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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孝道)는 우주 도(道)의 기본이요, 근본(根本)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중 다섯째 계명이다.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단어들이 한국에는 있었다. 부모효도, 정절, 삼강오륜...등등. 옛날 우리 선조들은 하나님을 몰랐어도 부모님을 하나님같이 섬긴 효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한 임금께 충성하고, 한 남편을 섬기는, 도덕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민족이였다. 그래서인지 이 지구상에 가장 축복받은 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였던 한국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어떠한가? 머리 꼬리 상하 없는 무질서한 혼돈한 세상,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악을 행하기에 담대한 변형된 유전자 악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어떤 인간이 변개하거나 파괴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십계명(十誡命) 중 다섯째 계명(父母孝道)과 칠계명(姦通罪)을 파괴함으로 무법천지(無法天地) 세상이 되어 버렸다.
마치 급경사에서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처럼 걷잡을 수 없는 잔악한 범죄의 홍수가 흘러 넘친다. 그 물결을 막을 자가 없다. 며칠 전 뉴스에 10대가 PC방에 갈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70대 노인을 때리고 큰 절까지 시킨 회괘망측한 장면이 CCTV에 포착 되어 공개 되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날이 갈수록 경악할 수 밖에 없는 각종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사기...정말 기절초풍할 노릇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흑암 세상에 광명한 빛을 발산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있다. 이미 세월 속에 진실이 묻혀버린 것 같지만 언젠가 그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는 법. 몇 년 전 양쪽을 듣고, 보고, 취재해서 공정하게 보도해야 할 S방송사에서 누구나 시청하면 분노할 수 밖에 없도록 짜집기 해서 검증도 없이 사실인양 방영했던 '창기십자가 공동체'가 바로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父母孝道'를 실천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의 중심에 서 계시는 선생님께서는 너무 겸손하셔서 '천하의 불효자'라고 말씀하셨만 두 어머님(친어머님과 장모님)께서 눈을 감으시는 순간까지 친히 모시면서 '부모효도'에 本을 보이셨던 '천하에 없는 '孝子'이셨다. 제자는 스승을 닮는 법, 그를 따르는 제자들 또한 부모님을 보이는하나님처럼 모시고 섬긴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이런 공동체가 지구상에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예화가 생각이 난다. 한번은 서당 선생님이 동네에 20명 정도 되는 제자들을 불러 놓고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바람 풍(風)'자를 가르칠 때가 되었는데 그 선생님은 입술이 갈라지신 분이라 '바람 풍' 하니까 헛바람이 나와서 '바담 풍'한 것이다. 그러니까 20명 되는 제자들이 선생님을 따라서 '바담 풍'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얘들아 나는 '바담 풍'해도 너희들은 '바담 풍'해라." 그러니까 "예, 그러죠." 하고는 종일 '바담 풍'하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선생이 먼저 '바람 풍(風)'이라고 똑똑히 말하고 제자들에게 '바람 풍'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인간에게 맡겨 주신 사업 중에서 품성(品性)을 형성시키는 것보다 더 고상한 사업은 없다"(ST 1888. 7. 13)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계와 종교계의 현실은 어떠한가. 잠시 뒤를 돌아다 보고 반성을 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필자는 여기서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에게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는 푸에르토리코의 국립미술관에 걸려 있는 '젊은 여자의 젖을 빠는 노인'이라는 작품을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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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을 보는 순간 어떤 생각이 드는가? 민망하고 수치스러워서 불쾌한가?
그러나 그 내용을 알고 보면 이 그림은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감동으로 새겨진다. 노인은 푸레르토리코의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이며 젊은 여인은 그의 딸이다. 항거를 하다 감옥에 갇혀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 날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잔인한 형벌이 내려졌다. '음식물 투입금지'... 노인은 서서히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딸은 해산한지 며칠 지나지 않은 무거운 몸으로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위해 감옥을 찾았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앞에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었다. 그리고 젖을 물렸다.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이것이 이 그림의 내용이다.
이제는 이 그림이 어떻게 보이는가? 부녀 간에 헌신적인 거룩하고 숭고한 사랑으로 느껴지는가?
같은 그림을 보고도 처음에 본 시각과 나중에 본 시각이 180도로 달라진 것은 그 본질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눈물겨운 사랑의 孝道였다. 누가 이 여인에게 음란한 행위라고 비난의 돌을 던질 자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가끔 본질은 파악 하지도 않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우를 범한다.
본질을 알면 시각이 달라지는 것처럼 창기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유한한 인간의 두뇌로 하늘의 높이와 넓이를 잴 수 없듯이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다 측량할 수가 없다. 효(孝)가 살아있는 유일한 아름다운 창기십자가 공동체의 본질(本質)을 알면 시각이 달라질 것이다. 창기십자가의 본질을 알 수 없다면 '혀'를 함부로 놀리지 말고 차라리 '침묵'을 지키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