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뉴스 최초로 2015년 12월 3일자 “비운의 여성 독립운동가 김하란사의 생애 재조명” 제하의 칼럼을 발표한 날에 몇년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였으나 끝내 밝히지 못하였던 석고각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석고각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된 이후 본래의 계획을 일부 수정하게 되었으니, 그만큼 석고각의 존재는 필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김하란사 관련 칼럼을 발표한 이후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2탄으로 연구하고 싶은 인물까지 선정하였는데 실로 생각지도 못하였던 중대변수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서 2009년 11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구심점(求心點)이라 할 수 있었던 원구단(圓丘壇)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석고각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석고각은 본래 원구단(圓丘壇) 동쪽영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석고단 영역에 조성된 건축물인데 구체적으로 고종황제(高宗皇帝) 즉위 40주년이 되는 1902년(광무 6)에 고종황제(高宗皇帝)의 공덕(功德)을 기리는 의미에서 조성된 석고(1909년 완성)를 보호하는 전각(殿閣)으로서 1903년(광무 7)에 건립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석고각이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 1913년 원구단(圓丘壇)이 철거되면서 그 수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인데, 구체적으로 석고각이 위치하고 있던 원구단(圓丘壇) 동쪽영역에 1923년 조선총독부도서관(朝鮮總督府圖書館)이 건립되면서 본래 석고단 영역의 정문이었던 광선문(光宣門)이 1927년 남산의 일본식 사찰(寺刹)인 동본원사(東本願寺)의 정문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고 급기야 1935년 석고각이 이등박문을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博文寺)의 종을 보호하는 종루(鐘樓)로 사용되는 수모를 당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등박문을 추모하였던 사찰(寺刹)인 박문사(博文寺)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한다.
박문사(博文寺)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이 안중근 의사에 의하여 저격된 이후 이등박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1932년 10월 26일 장충단 동쪽 영역에 건립되 었으며, 4만 1,882평의 넓은 부지에 철근콘크리이트 2층, 건평 358평의 일본식 사찰(寺刹)이었다.
일제는 을미사변과 임오군란때 순국(殉國)한 충신(忠臣),열사(烈士)들의 제사를 거행한 유서깊은 장소였던 장충단(裝忠壇)에 이등박문을 추모한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하는데 그치지 않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이건(移建)하여 박문사(博文寺) 정문으로 사용하고 더불어 조선총독부도서관(朝鮮總督府圖書館)에 위치하고 있던 석고각도 이건(移建)하여 종루(鐘樓)로 사용함으로써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실의 권위를 여지없이 실추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석고각에 중대고비가 있었으니 광복이후인 1945년 11월 23일 박문사(博文寺)에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인데 참으로 천만다행으로 석고각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로부터 13년후가 되는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영빈관(迎賓館) 부지 선정을 위하여 장충단(獎忠壇)에 현장답사 나왔을때 석고각이 그 늠름한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는 모습과 더불어 1960년 2월 장충단(獎忠壇)에서 민주당 시국강연회(時局講演會)를 개최할 때의 사진에 석고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1960년 2월이후의 석고각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각도로 조사하였으나 발견하지 못하여 결국 석고각에 대한 조사는 중단하고 말았다.
필자가 석고각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비단 그뿐만 아니라 석고각의 모습을 사진을 통하여 처음으로 보는 순간 그 장엄하고 웅장한 규모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마치 원구단(圓丘壇)의 축소판(縮小版)을 대하는 듯한 강한 영감(靈感)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덧 2015년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12월 3일에 몇년동안 조사는 중단하였지만 마음속에서 그 존재여부가 궁금하게 생각되었던 석고각의 새로운 진실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날은 공교롭게도 브레이크뉴스에 최초로 김하란사의 일대기를 발표한 날이었는데 이러한 날에 석고각의 새로운 진실을 알게되어 참으로 감개무량한 심정 금할 수 없다.
석고각이 1965년까지 장충단(獎忠壇) 그 자리에 있었는데 창경원의 야외무대 설치계획에 의하여 석고각을 해체하고 그 이듬해에 석고각을 창경원으로 이건(移建)하여 결국 야외무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인데 필자로서는 야외무대가 얼마나 중요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창경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석고각을 이건(移建)한 배경이 궁금하게 생각된다.
정부에서 석고각을 이건(移建)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면 석고각이 본래 위치하고 있었던 소공동(小公洞) 석고단 영역으로 옮겼다면 본래의 자리인 만큼 그 명분에도 참으로 합당한 조치라고 할 수 있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연관성이 없는 창경원으로 옮겨야만 하였는지 이러한 결정이 이루어지게 된 과정을 자세히 알고 싶다.
필자는 특히 1965년 장충단(裝忠壇)에 있었던 석고각이 해체작업을 거쳐서 1966년 창경원 야외무대로 이건(移建)되는 과정에서 영빈관(迎賓館)을 주목한다.
영빈관(迎賓館)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8년 11월 월남을 방문한 이후 당시 오재경 공보실장이 건의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장소는 박문사(博文寺)터로 정하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현장답사한 이후 최종결정되었다.
1959년 1월 영빈관(迎賓館) 건립계획이 세워진 이후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격동기(激動期)의 상황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65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서 총무처 산하에 영빈관건축추진위원회(迎賓館建築推進委員會)가 구성되었고 2년간의 공사끝에 1967년 2월 28일에 준공되었다.
위의 내용을 분석하면 영빈관(迎賓館) 공사를 하는 기간에 석고각이 이건(移建)되었다는 점인데 구체적으로 석고각이 1965년 해체되어 1966년 창경원으로 이건(移建)되는 것인데 바로 이 시기는 영빈관(迎賓館)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시기에 해당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영빈관(迎賓館) 공사와 석고각 이건(移建)이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1989년 문화재관리국에서 간행한 “창경궁 중건보고서”에 근거하여 창경원 야외무대가 처음에 1965년 10월 25일에 착공하여 1965년 12월 27일 준공되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야외무대가 무슨 이유인지 자세히 모르겠지만 해체되고 1966년 10월 14일 그 자리에 장충단(裝忠壇)에 있는 석고각이 이건(移建)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1984년 창경궁 복원사업을 추진할 때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석고각이 철거되었다는 사실인데 창경궁을 복원하는데 있어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석고각이 왜 철거가 되어야 했던 것인지 그 과정 또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1960년 2월이후의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석고각이 건립된지 불과 80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 이 통탄스러운 심정 어찌 필설로 형언할 수 있겠는가!
석고각은 일제강점기에 그 규모와 위상으로 볼 때 국보급에 해당하는 황실문화재로 평가받았거늘 그러한 석고각이 일제강점기에는 박문사(博文寺)의 종루(鐘樓)로 전락하고 광복이후에는 창경원의 야외무대가 되는 그치지 않고 마침내 그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필자는 그동안 전혀 몰랐던 석고각이 철거되기 전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한 이후 문화재청에 석고각과 관련된 민원을 신청하여 현재 회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결론적으로 석고각은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문화재였으며, 마치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대하는 그런 애절한 심정이 느껴지는데 일제강점기 국보급 문화재의 위상을 보여주었던 석고각의 불행한 역사를 결코 잊지 말기를 간곡히 호소하며, 비록 석고각의 복원이 힘들다고 하더라도 석고각이 왜 없어진 것인지 그 진실만큼은 규명할 수 있도록 혼과 정성을 다할 것이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역사작가.칼럼니스트.<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