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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몽(胡蝶夢)의 예술혼, 김희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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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 기자

 

지하실에 자리한 그녀의 아틀리에는 항상 물감 냄새가 은은하다. 잘 정돈된 작업장 한 켠에는 다양한 종류의 붓과 나이프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나이프는 연륜을 자랑하듯 반질반질 윤기를 발산한다. 바로 이 붓과 나이프가 이젠 김희재 화백만의 고유명사를 탄생시킨 ‘붓칼화법’의 주인공들이다. 이 주인공들은 수많은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은 환희와 격정, 고뇌와 애환, 고독과 적막의 나이테를 휘감고 있다. 진정 이 붓과 나이프들은 김희재 화백의 또 하나의 분신 같은 존재이리라.

 

아틀리에서 나는 그녀가 최근에 완성한 그림 앞에 섰다. 화폭 속의 그림은 처음에 나를 깜짝 황홀경으로 내몬다. 잠깐 다음에는 내 몸 안의 세포를 하나하나 일으켜 세워 거대한 전율에 휩싸이게 한다. 그러면서 나는 문득 ‘기억속으로’ 빠져 든다.

 

분명 그녀의 예전 풍경화와는 너무 다르다. 그녀의 풍경화에서 보아온 색조나 시간대, 그리고 평범한 소재들은 거기 그대로이다. 여명의 여신이 어둠의 커튼을 막 열어재친 그 순간의 시간대, 혹은 해질녘 그 순간의 시간대는 변함이 없다. 또한 빛바랜 색조라든가, 들판에 자란 엉겅퀴와 억새풀 그리고 야생화들도 한결같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야생초와 야생화 너머에 하늘과 맞닿아 있는 광활한 공간과 적막한 시공도 그대로이다. 그밖에 호수, 산, 운무 모두 그 자리에 그렇게 있다. 그런데도 결코 예전 그림과는 그 상징적인 높이와 깊이 그리고 넓이가 같지 않다. 그래서 예술은 완결될 수 없다고 하는가 보다. 그녀의 화폭은 완성되기를 끝없이 거부하면서 채워져 간 것이다. 그 비밀은 무엇일까? 호기심으로 또다시 나의 가슴은 쿵쿵거린다.

▲     © 이한 기자

 

예전에, 몇 번 나는 그녀의 심연 밑바닥으로 숨어들어가, 그녀가 꽁꽁 숨겨둔 비밀서랍을 몰래 훔쳐본 적이 있다. 

 

그때 엿본 풍경화의 수수께끼는 소멸과 생성, 하강과 상승의 변증법이었다. 부재와 부재의 대결을 통하여 존재로, 부정과 부정의 대결은 통하여 긍정에로 나아가는 자아와 세계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지상에서 천상에로의 비상과 동시에 지상과 천상의 합일을 표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풍경화들은 독한 아이러니의 또 다른 비밀을 간직한다. 그녀가 건져올린 기억의 잡동사니들은 단순한 파편의 기억들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과 육체에 새겨지고 축적된 트라우마(trauma)이다. 

 

김희재의 풍경화는 나이프를 사용하여, 마치 옷감을 짜듯 현실에 대한 표면장력을 매우 정교하게 조직화한다. 이것은 그녀의 그림이 보여주는 절제된 구도와 단아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의 그림은 감정의 적절한 내보임과 숨김, 그리고 침묵과 소리의 넘나듦이 있다.  

 

관조와 연민의 조절, 고요와 성찰의 조화가 있다. 이것이 그녀의 풍경화의 구도이자 삶의 구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물에 대한 깊은 깨달음은 자아가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주체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 이한 기자

 

그녀의 화폭에 담겨진 그림의 전체적인 짜임새를 엿보면, 각각 2단계와 4단계의 시놉시스를 갖는다. 먼저 2단계에서는, 들판에 야생초와 야생화가 가득한 위로 무한대의 황량한 시공이 펼쳐진다.  

 

그러한 들판에 자리한 한 그루 엉겅퀴가 홀로 우뚝 적막한 공간에 흩날리며 서 있다. 이 엉겅퀴는 아마도 김희재의 아니마(anima)가 아닐까? 4단계는 야생초 혹은 야생화로부터 시작하여, 다음 단계인 호수 혹은 강, 그 다음 단계인 산과 암반, 마지막 단계로 구름 혹은 운무로 짜여져 있다. 이 시놉시스야말로 그녀가 숨겨놓은 비밀의 창고이자 열쇄다.  

 

여기서 들판은 그녀의 무의식에 자리하며 감싸고 있는 광활함과 무한한 잠재력의 상징이다. 우리의 서사무가 중 ‘바리공주’가 있다. 공주는 비록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부모의 목숨을 구할 영약을 찾아 서천 서역국으로 간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바쳐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개안초(開眼草)와 삼색꽃을 얻어 돌아온다. 들판의 엉겅퀴와 억새풀 그리고 야생화는 그녀가 얻어낸 개안초와 삼색꽃이다. 이들 야생초와 야생화는 바로 그녀의 정신적 표상으로써 황무지에서 안간힘을 다하여 마침내 약동하는 끈질긴 생명력을 획득한 것이다.

  

호수는 무의식의 심연이다. 그녀의 모든 기억의 파편들이 세상을 유랑하고 돌아와 자진하는 곳이다. 들풀의 사각거리는 소리, 물결 소리, 바람 소리들이 호수에 모여들어 끝모를 고요를 펼친다. 그녀의 큰 눈망울은 호수를 응시하며 맨 밑바닥으로 침잠한다. 덧없는 세월이 아른아른 물결 따라 흐른다. 그녀는 불현듯 윤동주님의 시 ‘자화상’과 맞닥뜨린다. 여기서 ‘우물’과 ‘호수’ 그리고 ‘그녀’와 ‘사나이’는 서로 등가를 이룬다. 따라서 ‘호수’는 바로 그녀에게 있어서 자아성찰의 매개체이며 세속과 신성의 경계가 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 … 

 

바다의 여신 테티스(Tethys)는 그녀의 아들을 불사적 존재로 만들기 위해 스틱스 강에 담근다. 이것은 강물에 몸을 씻음으로써(정화, 淨化) 이전의 모든 기억을 망각하고 새로 태어남(재생, 再生)을 상징한다. 호수에서 새롭게 재생한 그녀는 이제 산 위로 오른다. 산은 그녀의 정신적 고향의 표상이다. 산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중간 지점이라는 인식에서 세계의 축(軸)이자 생명의 나무, 하늘에 오르는 사닥다리, 대우주의 척추로 상징되곤 한다. 그런 점에서 산은 하늘과의 교통, 신과의 교통을 상징한다. 덧붙여 바위나 암반은 우주의 뼈에 해당한다.

 

 

▲     © 이한 기자

 

구름이 상봉오리를 휘감고 아득하기만 한 그 풍경너머에 또한 흰 구름·∽∽ 산 위에 오른 그녀는 구름과 조우한다. 

도교적 관념에서 구름은 안개와 더불어 이상향 또는 피안의 징표가 된다. 또한 구름은 잡다하고 유한한 세속을 멀리 떠난 초월의 경지를 상징한다. 그리고 구름 저편의 산은 신선의 세계이기도 하다. ‘흰 구름’에 에둘러 있는 산은 ‘흰 산’을 탄생시킨다. 

흰색은 어떤 색으로도 물들일 수 있으나, 한편 어떤 색으로도 물들일 수 없는 그녀의 지존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심상이다. 흰색은 삼원색(三原色)의 중심에서 그것들의 차이를 중화시킨다. 따라서 색깔에 대한 완전한 근본이고, 그로부터 끝이며 또한 시작인 영원한 회귀성의 변화를 진행하는 색이다. 이러한 구름은 바로 그녀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예술혼의 환유적 등가물인 것이다. 

구름 위에 오른 그녀는 장자(莊子)와 포옹한다. 그리고 마침내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등장하는 호접몽(胡蝶夢)에 이른다. 고사에 의하면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가 깨어난다. 깨어나 생각해 보니 장자가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장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장자는 물화(物化)라고 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설파하였다. 그것이 장자가 꿈꾸는 이상세계이다.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영혼과 육체, 삶과 죽음을 함께 아우르는 우주 본질의 세계이다. 또한 아늑하고, 고요하고, 한가롭고, 편안한 절대 절명의 세계이다. 

그녀는 구름 위에 올라 호수와 산과 물아일체 되어 무위자연(無爲自然)하며 송시열의 시조 ‘청산도 절로절로’를 완상한다. “청산(靑山)도 절로절로 녹수(綠水)도 절로절로// 산(山) 절로 수(水) 절로 산수간(山水間)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이렇듯 김희재 화백이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시놉시스의 수수께끼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경지다. 이는 바로 호접몽의 물아일체에 다다른 예술혼의 세계와 다름 아니리라.

 

한편 김희재 작가는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에꼴드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수학하였으며 COIRS ADULTES POUR 과정(2003~2004)을 이수하였다. 총 18회 개인전을 가졌으며, 그랑팔레 비엔날레89, 인도국립미술관, 일본문화원 등에서 단체기획전에 다수 참여하였다.


원본 기사 보기:ebre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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