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재야’ 장기표가 보수의 옷을 입고 21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다. 이 모험이 과연 어떻게 제도권 정치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한국 근대 정치사를 논함에 있어, 장기표라는 이름은 언제나 재야의 최전선에 있었다. 군사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고, 핍박받는 서민들의 편에서 사회 모순을 질타하며 불꽃같은 투혼으로 일생을 관통해 온 대표적 진보 인사가 장기표다. 그런 그가 왜 보수의 옷을 입어야 했을까?
짐작건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현 정권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 아닌가 한다. 장기표와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안다. ‘도덕성과 헌신성’을 상실한 ‘변절 진보’가 선량한 백성들의 바람을 어떻게 유린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안다. 4‧19혁명, 6월 민주 항쟁,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혁명의 주체는 언제나 백성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유와 민주를 쟁취하는 데 앞장선 열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시민 혁명의 성공은 요원했을 것인 즉, 그분들의 이름이 논공의 앞자리에 있어야 함도 당연지사다. 그러나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혁명을 이끌었던 역사 속의 수많은 지도자가 어떻게 해서 백성들로부터 배척받게 되는지 그 과정을 알아야 한다.
서민 지도자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던 폴란드의 바웬사는 ‘대결 지향적 통치’로 인해 버림받았고, 브라질 노동 운동의 대부였던 룰라는 ‘부정부패’ 혐의로 수감되었으며, 중‧하류층 서민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아르헨티나의 페론은 ‘독재와 사회주의적 복지정책’을 펼쳤다가 이후 70년간 아르헨티나를 질곡에 빠트렸다.
어디 그들뿐이랴. 그리스의 안드레아스는 ‘범 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을 결성하여 총리가 된 후 선심성 정책을 펼치다가 경제 위기의 단초를 제공했고, 대화와 타협을 외면한 채 사회주의 경제 모델인 ‘볼리비안 혁명’으로 파산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도 있다.
이렇게, 초심을 잃은 지도자는 예외 없이 국가와 백성의 공적으로 전락했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혁명가의 실패는 개인적 몰락으로 끝나지만,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두고두고 후손을 괴롭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당시의 백성들은 이를 모른다. 이것이 바로 반복되는 후진국의 비애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작금의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사회인가? 공정과 평등이 사회적 약자에게도 차별 없이 적용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대로 아들딸에게 물려주어도 좋을 것인가?
과거, 엄혹했던 시절,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며 희생한 분들에게 국가는 보상법을 마련했다. 이른바 ‘민주화보상법’이다. 그분들의 우국충정에 비하면 궁색한 처방이지만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진다. 더해서, 통치 권력까지 맡겼다. 문제는 ‘돈과 권력이 순수를 범(犯)한다’는 것이다. 이상을 위해 바쳤던 열정이 왕왕 열매 앞에서 탐욕으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어느새 신기득권이 되어 ‘동물농장의 나폴레옹’처럼 불의를 정의로 포장하고, 민주의 깃발 아래 독재를 자행하며, 공정을 외치면서도 반칙을 일삼는 위선자가 된 슬픈 군상들……. 거짓말이 거짓말을 옹호하다 보니, 부끄러움은커녕 오히려 당당해진 ‘조국류(曺國類)’도 과거 한때는 순수했으리라.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역사를 영광으로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막중한 책무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국민총화’다. 이 대명제 아래, 크든 작든 분열적 책동을 일삼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적폐이며 청산의 대상이다. 유독 이 부분에서, 진보는 보수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다.
근래에 우리가 겪었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중 단연 압권인 ‘조국 사태’를 되짚어보자. 정상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부끄러움을 느끼고 엎드렸어야 했다. 부끄러움은 양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부끄러움이 있어야 반성을 한다.
그러나 당사자는 물론, 유시민․공지영을 비롯한 열혈지지자들은 만인에게 존재하는 ‘부끄러움과 반성’이라는 두 단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의 의식과 행동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는 상식이 아닌 임상병리학적으로 접근해야만 설명이 가능하다 하겠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끄는 낡은 이념의 노예, 이른바 가짜 진보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국가적 보상이 시작되었을 때, 신청조차 하지 않은 ‘참 진보’ 장기표, 그런 그의 눈에 비친 ‘기득권 진보’는 ‘진보가 아닌 퇴보’였으리라. 보수의 적폐에 더하여 위선을 얹었으니, ‘카멜레온 진보에는 참 진보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 설득력을 갖는다.
아마도 이 비장한 모험의 배경에는 그만의 대명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번 총선을 단순한 여야의 대결, 진보와 보수의 대결로 본다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것은 단 하나임이 분명하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 그것만이 그의 마지막 선택을 설명할 수 있다.
아무튼 그가 필마단기로 험지에서 살아남아 여의도에 입성한다면, 그가 내건 표어처럼, 한국 정치의 태풍이 될지 미풍으로 그칠지 우리는 관심 깊게 지켜볼 것이다. lee60616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