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밤은 깊어가고
서울의 거리에는 개나리가 활짝 피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바삐 움직이며 수집된 정보로 막 탈고를 하고 식당으로 향하는 강 기자의 눈에 처음으로 활짝 핀 개나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강 기자가 정읍식당에 들어서니 신소녀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 얼른 뛰쳐나왔다. 보고 싶었는데 왜 자주 오지 않았느냐고 뽀로통한 입술과 꾸짖는 눈빛이 귀엽기까지 했다. 요즈음은 시간을 아끼느라 신문사가 있는 마포와 통일부가 있는 광화문 근처에서 주로 식사를 하다 보니 지근거리에 있는 인사동도 쉽게 올 수 없었다.
방에는 벌써 기본 반찬이 차려져 있었다. 시간을 쪼개 쓰는 오빠들의 입장을 고려한 배려였다. 약속시간이 되니 시간을 칼처럼 지키는 것을 매너로 알고 있는 친구들이 다 도착해서 성원이 되었다.
무엇을 주문한 것도 아닌데 오빠들의 식성을 꿰차고 있는 신 대표가 오늘 주 메뉴를 돼지고기 쌈밥으로 준비해 두었다. 여기에 달래와 씀바귀무침, 봄동 겉절이, 냉이국과 홍탁 삼합이 곁들여졌다. 오빠들을 생각하는 신 대표의 정성이 그득 담긴 입맛을 돋우는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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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그동안 서로 바빠 3월 모임도 하지 못했고, 잘못하면 이번 달도 어려울 것 같아 내가 급히 제안을 했소.”
정읍의 특산물인 자생녹차로 입가심이 끝나자 강 기자가 먼저 본론을 이야기했다.
“먼저 그동안의 근황을 내가 먼저 이야기하고 차례로 돌아가면서 이야기 합시다. 지난주에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역과 탈북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단둥지역을 다녀왔네. 국경지역에는 중국과 북한 모두 살벌하게 군사력을 증강 배치하고 있었네. 특히 중국군은 기계화군단을 국경지역 근처로 추진하여 배치하고 있어 많이 놀랐지. 탈북난민들은 무척 불안해하며 떨고 있었네. 그리고 개성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민국이가 집에 다녀갔다네. 민국이 말에 의하면 개성지역의 상황은 폭발 일보전의 휴화산과 같다고 하네. 친구들이 잘 알다시피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국의 정세도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지. 통일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은 데, 그들이 이를 방해하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은 유사시에는 북한지역에 먼저 진입하든지, 한반도를 재분할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네. 즉 통일 직전의 독일과 비슷한 상황이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네.
통일은 말없이 다가오고 있는데 많은 국민들이 두려워하고 있지. 자네들도 잘 알지만 통일이 어려운 문제만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골드만 삭스는 한반도가 통일이 된다면 2050년경에는 일본과 독일 등을 제치고 세계 5위권 이내의 일류국가가 될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네. 심지어 세계의 중심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기관도 늘어나고 있지. 우리는 통일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야 하고, 갑자기 다가올 수 있는 통일에 대한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고 보네. 이를 위해서는 정치권에서 주도적으로 논의하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직 미흡하다고 보네.
그래서 우리가 초심으로 돌아가 1990년대 초에 당시 베를린에서 만나 밤새워 가며 정열적으로 토의했던 사항들을 다시 한 번 들추어보며 미래지향적인 좋은 안들을 논의했으면 하네. 자네들 생각은 어떤지?”
강 기자는 동의를 구하듯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시의적절한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하네.”
황만주 국정원 대북정책담당관이 나서며 말을 받았다.
“우리 강 기자가 단둥에 있는 탈북민 수용시설을 다녀왔다고 했는데, 나도 최근에 그곳을 다녀왔네. 지금 북한에서는 많은 정치범들이 처형되고 있지. 특히 평양에 내려진 계엄령 이후 처형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네. 나는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한국형 ‘프라이카우프Freikauf’를 검토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네.
우리 정부는 지난 20년 동안 프라이카우프를 검토했었지. 그러나 정파논리에 막혀 지금까지 한국형 프라이카우프를 통해 자유를 찾은 납북자나 국군포로는 단 한명도 없었네. 이산가족문제가 해결된 사례도 없다는 것은 친구들도 잘 알고 있잖은가.
프라이카우프란 서독이 동서독 분단체제에서 동독의 정치범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고 데려오던 사업을 말하지.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직후인 1963년에 시작하여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1989년까지 지속되었다네. 이 사업이 지속된 26년간 3만 3,755명의 동독 정치범이 서독으로 넘어왔고, 이에 대해 약 15억 달러인 34억 6,400만 마르크 규모의 생필품이 대가로 동독에 지급되었지. 동독 반체제 인사 1인당 약 10만 마르크를 지불한 셈이며, 이는 당시 서독 1인당 국민소득의 5배를 상회하는 큰 금액이었다네.
사업은 서독 정부의 지원 하에 서독 교회와 동독 비밀경찰을 창구로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되었지. 당시 서독의 유력 언론이었던 슈피겔지가 프라이카우프 관련 내용을 보도했을 때, 서독 정부는 사업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네. 나중에는 언론사 편집인들에게 국익차원에서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었네. 언론사들은 숙고 끝에 정부의 방침에 협력하기로 했지. 그 후 사업이 종료될 때까지 이 사업은 단 한 번도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었네.
‘동독에 대한 경제지원은 동독정권의 안정에 기여한다.’ 이것은 1970년대 서독 내 보수진영이 동독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는 기본논리였지. 하지만 ‘신동방정책’을 추진하던 당시 빌리 브란트 총리는 ‘대가의 지불이 동독 주민의 복지증대에 기여할 수 있고, 동독의 철권통치를 완화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들어 사업을 강행했었네. 이후 서독 보수정당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은 지속되어 많은 동독의 반체제 민주인사들에게 자유를 부여했지. 결과적으로 동독체제의 부도덕성과 정당성의 결여를 동독주민들에게 알리는데 기여했네.
프라이카우프 사업이 성공을 거둔 열쇠는 비밀유지와 함께 정권의 성향을 넘어선 정책적 지속성에 있었다네. 비밀유지는 서독사회 내의 불필요한 갈등과 분열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지. ‘우리에게 정치범은 없다’고 주장했던 동독 정권의 협력을 유도했네. 동독 정권은 서독으로부터 받은 물질적 대가를 이용해 자신들의 정권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었네. 프라이카우프 사업이 독일 통일을 앞당겼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라네.
동독 정부는 프라이카우프를 통해 골칫덩이인 반체제인사들을 서독으로 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독의 지원을 자신들의 정권을 안정화시키는데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 만족했었지. 그러나 이는 장기적으로 동독주민에게 서독의 정통성과 도덕적 우월성을 확립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네. 동독주민의 어려움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서독 정부의 지속적 노력을 동독 주민들에게 숨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네. 그 결과 동독주민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베를린장벽을 허물고 서독을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었지.
인도적 문제에 있어 여야와 정파 간의 인식차가 있을 수 있다고 보네. 다만, 국군포로, 납북자와 이산가족 문제의 신속한 해결을 넘어 인권의 절망적 사각지대인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루 빨리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 급박함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 않은가? 또한 그것이야말로 우리 체제의 도덕적 정당성을 스스로 확인하는 당당한 길이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금이 프라이카우프 제도를 시행할 수 있는 최적기라 생각되어 이를 강력히 주장하네. 우리 국정원에서 이를 주장했었는데 정치권의 공감을 못 얻어 지금까지 북한과 협상을 못하고 있지. 우리가 이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함께 노력해보세.”
“친구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그에 대해 나도 한마디 하고 싶네.”
강 기자가 나섰다.
“몇 년 전이지만 어느 대북사업가가 북한과 중국의 접경지역에서 북한주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네. 당시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질문에 대다수 북한주민들은 한국이 아닌 중국을 선택했었지. 남북관계가 경색된 현재의 상황이 당시보다 좋을 리가 없다고 보네. 북한주민이라고 해서 중국에 대한 정서가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핏줄보다 중국을 선택한 북한주민의 마음을 어찌 해석할 수 있을까? 그들이 어렵고 힘들 때 우리가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동포의 모습을 보였다면, 이와 같은 결과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네.
결정적인 순간에 동독의 주민들은 서독을 선택했네. 이는 프라이카우프 등 동독을 향한 서독의 장기 전략에 입각한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였지. 현재와 같은 남북관계가 지속된다면 북한주민들이 독일과 유사한 상황에서 한국을 선택할 것이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통일은 요란한 구호로 오지 않으며, 실천의지를 담은 구체적이고도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로 다가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현 시점에서 통일정책의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을 향해 가용한 모든 정책과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이 북한주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일이라고 보네. 어떠한 상황에서도 북한주민의 고통을 경감하고 인도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네. 이를 위해 여야와 정파를 초월한 협력체제의 형성과 국민적 합의구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보네. 우리에 대한 북한주민의 신뢰 없이 우리가 원하는 통일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네. 우리 친구의 이야기대로 독일통일의 평범한 비밀을 우리 모두가 깊이 반추할 때일세. 늦었지만 바로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하네.”
“두 친구의 훌륭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당시 주변국을 설득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거인 콜 총리를 생각하였네.”
고개를 연신 끄떡이며 듣던 이대한 외교부 정책기획관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다가오는 통일과정에서 주변국들의 지지와 협조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지. 그들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네. 통일 한국이 주변국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리라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지. 그래야만 당시 영국의 마가릿 대처 수상이나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독일 통일을 반대한 것처럼, 한반도 통일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되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주변국들은 자신들의 안정을 위해 한반도의 안정적 구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독일의 통일을 국제적으로 보장한 2+4조약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네. 2+4조약은 독일 통일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주권 문제, 군사적 문제, 영토 문제를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지. 우선 독일은 2+4조약으로 인하여 주권을 완전히 되찾았네. 독일 이외에 조약에 참여한 전승 4개국인 미국, 소련,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들의 동맹을 결정할 권한을 갖게 된 것이지.
독일은 더 이상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천명하기 위하여 군사적인 문제 또한 ‘2+4조약’에 담았었네. 그래서 독일군의 규모는 37만 명으로 제한되었고, 핵확산금지조약이 동서독 모두에 대해 적용되었었지. 동독지역과 베를린에는 외국군과 핵무기 및 핵무기를 장착할 수 있는 무기가 금지되기도 하였었네. 조약체결 이전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이 동독지역의 방어를 맡았었지. 이것은 1994년 소련군이 동독지역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이어졌었네. 그래서 우리가 베를린에 있을 때도 소련군을 구경했었지. 우리 모두 너무 잘 알고 있듯이 소련군의 주둔과 철수에 관한 비용은 서독 정부에서 지원했었지. 이 조약은 독일의 국경을 확실히 정하여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에 일어날 수 있는 영토 분쟁을 방지하고자 하였었네. 그 결과 독일의 영토는 동독, 서독의 영토 및 베를린으로 결정되었었지. 우리도 주변국의 영향력과 우려를 감소시키기 위해 이러한 회담과 조약이 필요한지를 잘 검토해야 할 걸세.”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국제적인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는 친구의 좋은 제안 잘 들었네. 우리에게 ‘2+4회담’이 유용할지 혹은 ‘2+2회담’이 더 바람직할지는 조금 더 검토해볼 문제라 생각하네. 내 생각에는 간접 당사자인 러시아와 일본은 일단 제켜놓고 직접 이해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을 회담에 초청하는 것이 어떨까 하네”
황만주가 다시 나서며 의견을 제시했다.
“앞으로 북한의 변화는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을 것이네. 김정은 정권의 북한은 근본적으로 변화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왜냐하면 북한은 1990년대 동구권의 변화과정에서 체제가 무너지고 정권이 붕괴되는 과정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변화가 바로 체제와 정권유지에 영향을 주리라고 판단하기 때문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변화를 위한 제한요소와 촉진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지. 따라서 북한 변화의 제한요소를 제거하고 촉진요소를 강화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네. 그래야 우리가 우려하는 북한의 ‘급변사태’를 막을 수 있고, 급변사태 발생 시는 이를 잘 활용할 수 있을 걸세.
이를 위해서는 그동안 우리가 연구해온 독일의 통일정책을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지. 통일 전의 동독도 지금의 북한과 유사한 제한요소를 갖고 있었지. 따라서 서독의 교류협력과 통일의 과정을 보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왜냐하면 서독은 통일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간접적인 접근전략을 통해 동독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네. 동독이 공산주의체제와 공산당의 정권 유지를 위해 변화를 거부한 가운데서도, 교류협력을 지속하는 전략을 유지하였기 때문이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분단 이후 서독은 긴장완화와 분단고통의 감소라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통해 동서독 간 교류협력을 활성화시켰지. 특히 사민당의 브란트정부는 양 독일 간의 정치와 군사문제를 경제교류협력에 연계시키지 않는 정경분리원칙에 의하여 민간부문과 경제교류협력을 증진시켰네. 정부 차원의 경제협력은 분단고통의 감소, 긴장완화 차원에서 서로 연계시키는 상호주의 전략을 취하였지.
즉 서독은 베를린과 연결하는 교통망 확충을 위해 고속도로 및 운하건설에 14억 마르크를 연방재정에서 부담하기로 하였지. 동독 측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서독 사람들이 동독을 방문할 때는 산재연금 수령자는 최소 환전의무를 면제해주고, 정치범을 석방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네. 이외에도 1983년과 1984년에 서독정부는 동독에게 19억 마르크를 제공하였으나, 상호주의 원칙에 의거하여 교류의 확대, 내독 간 국경에서의 수속절차 완화, 환경과 문화협정 회담 재개 등을 동독 측에 요구하고 이를 성사시켰었지. 정부차원의 경제협력은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하였으나, 동독주민들의 생활수준을 증진시키기 위해 서독주민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동독주민들에 대한 각종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인도주의적 민간지원을 확대하는 정책도 동시에 추진하였네. 이를 통해 서독정부는 동독주민들이 서독사회를 동경하게 유도하였지.”
“아! 그렇지! 맞아! 나도 자네들의 의견에 동의하네. 서독이 추진한 ‘신동방정책’ 아래에서 동독의 변화를 위해 도모한 전략과 정책에 대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시사점을 짚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김상웅 회장이 나서며 이야기 했다.
“먼저, 서독은 동독과 교류협력을 추진하면서 동독이 교류협력에 소극적이라는 측면을 고려하여 비탄력적 상호주의 원칙에만 집착하지 않았었지. 예를 들면 공연, 전시회, 운동경기 등을 개최하는 경우에는 동독에서의 개최빈도와 서독에서의 개최빈도를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지역에서만의 개최조차도 수용할 수 있는 탄력성을 보여주었다네. 또한 이러한 교류협력에 소요되는 비용부담의 경우에도 동독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고려하여 서독이 좀 더 많은 부담을 안을 수 있다는 자세를 보여주었지. 그리고 교류협력의 지속적인 유지를 고려하여 가능한 한 일방통행식의 교류를 자제하였네. 교류의 내용과 폭은 다양한 내용을 가지되, 이해관계가 호혜적 차원에서 관철될 수 있는 자세를 견지하였었지. 즉 포괄적이고 신축적인 상호주의를 적용하여 동독의 변화를 촉진시켰다네.”
“친구의 말에 동의하면서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네.”
이대한이 말을 받았다.
“서독은 교류협력분야를 선정할 경우에는 가능한 동서독이 공동으로 관심을 가지는 분야 중 동독이 상대적인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좀 더 쉽게 응해 오리라고 여겨지는 부문과 교류협력을 통해 동독이 경제적으로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분야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었지.”
“참 좋은 이야기야! 이것도 좋은 시사점이 될 수 있을거야.”
황만주가 나서며 말을 꺼냈다.
“서독은 정부와 병행하여 민간차원에서 교류협력이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인도적이고 행정적인 지원과 함께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지. 특히 서독은 민족적 동질감을 증진시키기 위해 청소년 교류를 지원했었네. 동독체제의 선전을 위해 추진했던 청소년 교류는 선발된 동독 청소년들이 오히려 서독체제에 동경심을 갖게 되는 역효과를 가져왔지. 중요한 사실은 동서독 청소년들 간의 만남이 상호 현실 및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무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네. 즉 밑으로부터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촉진하였네.”
“혹시 이 점도 매우 중요하지 않을까?”
박겨레 장군이 군인의 입장에서 우려되는 사항을 짚었다.
“동서독 교류협력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서독이 동독과의 교류협력에서 현금 대신 물품지원을 선호했다는 사실이야. 이는 북한이 남북 교류협력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외환을 핵개발 등 군사 분야에 투입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는 우리의 우려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제시한다고 보네.”
“모두 훌륭한 의견이라 생각하네. 나는 상호주의 정신을 강조하고 싶네.”
조용히 듣고 있던 강 기자가 나섰다.
“서독은 ‘접촉을 통한 변화’라는 통일정책 아래에서 인적 교류를 물적 교류와 연계시켜 교류의 폭을 확대시키는데 최대의 초점을 두었지. 그래서 인적교류의 확대를 위한 양보를 동독으로부터 받아내기 위하여 동독이 양보할 때마다 신축적 상호주의 전략에 따라 적정한 대가를 지불했었네. 동서독 간의 교류협력 관계는 서독의 적극성과 동독의 소극성이 맞물려 처음에는 극도로 제한된 교류에 한정되었었지. 그러나 특수한 관계를 정립한 기본조약 이후 호혜주의에 바탕을 둔 상호주의 정신에 따라 교류와 협력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나아가 민족적 동질성 회복을 추구했었네.”
“야! 우리 친구들 참 대단해! 우리가 이렇게 요약정리를 하니 한 눈에 쏙 들어오네.”
통일정책의 문제를 처음 제기한 이대한 정책기획관이 다시 말을 받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서독정부가 동독의 변화를 추구했던 ‘신동방정책’은 1969년부터 1974년까지는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에 의해서 추진되었지만, 이어 1982년까지는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 의해 집행되었었네. 그 후 1982년부터 통일이 된 1990년까지는 보수당인 기민연 출신의 헬무트 콜 총리에 의해 추진되었지. 실제로는 이 시기가 ‘신동방정책’이 가장 많은 성과를 보여주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네. 이러한 사례는 지금의 남북한의 상황과 다른 점이 많지만, 우리는 여러가지 교훈을 도출할 수 있을 걸세.
먼저, 동서독 관계는 수많은 협정체결에 따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면서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지. 우리도 이렇게 하면 김정은 체제의 변화를 법과 제도적으로 강요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네.”
“서독정부는 동독과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동서독 간의 특수 관계를 고려하여 비탄력적 상호주의는 자제하였지만, 사안별로 포괄적이고 신축적인 상호주의를 적용하였네.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보네.”
강 기자가 다시 상호주의의 적용 문제를 강조했다.
“참 좋은 이야기야! 나는 교류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네.”
황만주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분단국가가 교류협력을 지속하기는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통일 전까지 동서독 간에는 매년 수백만 명의 왕래가 있었지. 남북한 간에도 이산가족 상봉, 식량지원 등 인도적 사업과 물자교역, 관광 등 경제교류, 그리고 체육, 학술교류 등 사회와 문화적 교류가 확대되어 북한 동포들이 남한의 실정을 많이 보고 느껴야 할 것이네. 보고 느끼면 변화하게 되어 있다고 보네.”
“동의하지만, 중요한 분야에서는 정부의 일정한 관여도 필요하지 않을까?”
김상웅이 민간인답지 않게 정부의 관여를 주장했다.
“북한의 개방 수준에 비례하여 북한과의 교류와 협력에 대한 우리 정부의 개입수준이 적절히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네. 사회주의의 공고화를 추진해왔던 동독의 경우, 상응하는 동서독 교류와 협력에서 동독정부가 배제된 적은 없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보네.
서독과 동독의 경험에서 보면 이념 및 경제체제가 상이한 분단국에서 교류협력을 확대하거나 법률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었지. 그러나 교류협력과 이를 통한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교류협력의 활성화는 필연적인 것이지 않을까? 변화를 하지 않으려는 집단과의 협상에는 많은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지. 서독정부는 이를 법과 제도로 뒷받침하여 동서독의 정권교체의 과정에서도 불필요한 분쟁과 시간 및 경제적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지.
지금 조금 늦은 감이 있고,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이러한 교훈을 지금이라도 잘 활용하면 상당한 도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동안 군에서 근무하느라 많은 것을 잊고 있었는데 오늘 참 중요한 것을 배워 행복하네.”
침묵을 지키며 친구들의 토론을 지켜보던 박겨레 장군이 감탄을 하며 말했다.
“나는 친구들이 걱정하고 있는 ‘급변사태’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하네. 사실 독일의 통일도 1989년 라이프지히 시위와 헝가리의 철책 개방 등이 큰 기여를 하였지. 베를린 장벽의 붕괴도 이날 귄터 샤보프스키 동독 공산당 대변인이 동서독 여행 자유화 조치가 ‘지금부터’ 시작된다고 잘못 밝힌 것이 크게 기여했다고 보네. 즉 사소한 일들이 통일의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것이지.
북한의 급변사태란 ‘북한 정권이나 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극도의 혼란사태’로 우리 정부가 비상조치를 강구할 필요성이 있는 상황을 의미하네. 친구들도 알다시피 ‘개념계획 5029’라는 북한 급변 사태 시 군대의 운용계획을 우리도 준비하고 있다네. 한미연합사령부는 북한 급변사태 유형을 핵과 미사일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WMD 유출, 북한정권의 교체, 쿠데타 등에 의한 내전 상황 발생, 대규모 탈북사태 등 크게 여섯 개의 유형으로 분류하고 행동계획을 마련하고 있지.
이러한 급변사태에 따른 북한의 붕괴시나리오는 외부와의 무력충돌을 통한 붕괴, 북한 내부 권력 간 충돌이 발생함으로써 붕괴, 그리고 북한체제가 안으로부터 무너지면서 붕괴하는 경우 등 크게 세 개의 상황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네.
내가 우려하고 있는 것은 김정은 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통제 불능의 위기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네. 여기에는 루마니아식의 내란 발생으로 인해 국가체제가 붕괴하는 경우로부터, 중국식으로 민중 봉기를 유혈 진압하는 경우, 그리고 동독식으로 민중의 궐기에 지배층이 타협하는 경우가 포함될 수 있다고 보네. 그 가운데서 발생 가능성 면에서 보면, 내란 발생으로 국가체제가 붕괴되는 루마니아식, 민중 봉기를 유혈 진압하는 중국식, 민중 궐기에 지배층이 타협하는 동독식으로 우선순위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네.
이러한 통제 불능의 위기사태가 발생하게 되면, 조성된 안보위기에 대한 대책과 함께 북한 동포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과 대규모 난민사태에 대한 관리 및 지원대책이 추진되어야 할 걸세. 그리고 결정적 시기가 조성될 경우, 선택적인 군사 및 비군사 개입에 이르기까지 매우 신축적이면서도 적시적인 상황대응이 불가피하게 요구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네. 그러한 상황대응의 결과는 민족공동체의 운명과 평화통일의 추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일세.
따라서 예상되는 사태에 대한 적합한 위기관리태세를 발전시키기 위한 실천적인 노력이 중요하네. 왜냐하면 준비되지 않는 북한의 급변사태는 오히려 우리에게 재앙이자,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지.
급변사태의 해결을 위한 기본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립할 수 있을 것이네. 북한 급변사태와 관련한 조기경보체계를 구축하고, 범정부 차원의 즉응태세를 확립해야 할 걸세. 우리의 안보역량을 총동원하여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해야 하며, 급변사태 초기에는 직접개입을 가급적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네. 국내정치와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의 안정을 유지하고 법질서를 확립하여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야 하지. 미국 등 한반도와 관련된 국가와의 긴밀한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외부세력의 부당한 개입을 차단하는 것도 중요할 것일세.
우리 친구들이 아마 걱정할 것으로 생각하는 북한에 대한 군사개입 유형에는 한국군이나 미군에 의한 단독개입과 한미연합군에 의한 개입 그리고 중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공동 개입이 있을 수 있다고 보네. 이 중 어떤 유형의 개입이 일어날지는 북한이 어떤 방식으로 붕괴되는가에 달려 있을 걸세. 개입형태가 어떠하든 북한이 붕괴되고 그 지역에 대한 군사개입이 이루어진다면, 그 군대는 적어도 군사작전, 민사작전, 북한군 무장해제, 그리고 대량살상무기 통제 등 네 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네.”
박 장군은 말을 마치고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했지 않았나 생각해서, 혹시 질문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친구들이 전문가들이어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우리가 우려했던 내용을 박 장군이 시원스럽게 이야기 해주어 무척 고맙네. 그러한 급변사태를 막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북한을 변화시켜 나가는 전략이 지금은 매우 중요한 것 아닌가 생각되네.”
강 기자가 평소 주장하는 지론인 북한변화전략을 이야기 하고자 말했다
“지금 북한체제의 변화를 위한 전략선택은 상호주의전략에 의한 화해적 포용과 대결적 압박의 이중 접근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되네. 문제는 북한의 김정은 체제가 우리의 화해적 포용정책의 열매를 즐기면서 현재의 체제적 난관을 극복하고 대남 주도권을 동시에 추구하려 할 수 있다는 것이지. 따라서 그들의 이중전략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우리의 대응전략이 중요할 걸세.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해소하고, 향후 김정은 체제의 바람직한 정책선택을 유도해야 한다고 보네.
우리가 독일에 도착하기 전의 이야기지만 1989년 10월, 동독을 살리려는 절박한 노력의 일환으로 공산당 서기장이 호네커에서 에곤 크렌츠로 교체되었었지. 현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면, 북한에서도 김정은이 교체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네.
따라서 현 시점에서 포용과 압박의 이중 접근전략은 불가피하나, 어느 쪽에 전략의 중심을 두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지. 먼저 북한체제의 변화를 위해 전략의 중심을 화해적 포용에 두고, 동시에 북한의 군사 제일주의 노선에 대처해 나가기 위한 대결적 압박을 병행하는 이중접근전략을 고려할 수 있네. 이와 반대로 북한의 군사 제일주의 노선에 대한 대결적 압박을 전략의 중심으로 삼고, 화해적 포용을 부가적으로 고려하는 이중접근전략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일세. 이 두 가지의 대안 중 현시점에서 우리의 전략선택은 북한체제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화해적 포용전략에 중심을 두고, 북한의 군사 제일주의 노선에 대처해 나가는 대결적 압박전략을 보조로 하는 이중 접근이 타당하다고 판단하네.
왜냐하면 우리에게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 등 군사 제일주의 노선 등을 실질적으로 견제 및 해소할 수 있는 대응 전략수단이 극히 제한되어 있고, 김정은의 퇴진 이후 북한체제의 변화야말로 그들의 군사 제일주의 정책의 포기는 물론 평화통일의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지.”
“참 좋은 의견이야. 현 시점에서 북한을 너무 몰아붙이면 김정은 정권보다도 더욱 독재적인 정권이 들어설 수 있으니 말이야. 나는 통일비용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네.”
김상웅 회장이 경제전문가답게 통일비용문제를 거론하며 토론을 이어갔다.
“독일 통일 당시 자네들은 전부 독일 통일현장에 특파원이나 파견관으로 나와 있었지. 그때 내가 가끔 출장을 갈 때면 독일소세지에 맥주를 마셔가며 밤새워 토의하던 일이 그리워지는군. 지금에야 말하는데, 그 다음 날 출장업무에 약간 지장을 받았지만 말이야. 그 당시는 우리도 10년 내에 통일이 되는 줄 알았지.”
“우리도 정말 가슴 설레며 분야별로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었지.”
이대한이 끼어들며 거들었다.
“독일이 통일된 후 가장 어려웠던 일이 통일비용을 지불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네. 우리가 1991년도에 만날 때만 해도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리라 생각하지 못했었지. 지금 국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천문학적인 통일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는 것이잖아.
독일정부는, 2005년 통계에 의하면, 통일 이후 15년 동안 약 2조 달러를 동독에 투자했다고 하네. 이 금액은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1,800조원 규모일세. 독일정부는 통일 이후 해마다 독일 국내총생산의 약 4%를 동독에 제공한 셈이지. 서독 주민들은 통일 이후 2005년 말까지 1인당 10만 유로를 동독을 위해 지불했다는 계산이 나온다네. 갑자기 통일된 독일이 이와 같은 천문학적인 통일비용을 조달한 방안은 대체로 절약 재정, 해외차입, 그리고 ‘통일세’ 신설 등이었지. 친구들도 잘 알지만, 그 과정에서 동서독 주민들은 서로 반목하며 갈등이 심했었잖아. 그러나 약 3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유럽의 최대 강국이 되었지.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 지금부터 통일비용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보네.
한반도 통일의 경우에는 비록 통일비용의 구체적인 액수는 다르지만, 독일통일처럼 많은 자금이 소요될 것이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네. 골드먼 삭스 등 주요기관들과 이명박정부에서 추정한 통일비용은 통일 시기와 방법 등에 따라 10년간 최소 1500억 달러에서 최대 2조 달러에 달한다고 예측하고 있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한반도 통일비용이 한국 GDP의 2∼3배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네.
이런 통일비용과 부작용은 우리가 영원히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한번은 소요될 비용이요, 겪어야 할 부담이지. 특히 기왕 겪어야 할 부담이라면 가급적 빨리 겪는 것이 훨씬 나은 그런 성격의 것이라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보네. 통일시기가 늦어질수록 통일비용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라는 것은 대체로 공통된 의견이지.
따라서 나는 통일이 가까이 다가오는 현 시점에서 늦었지만, 통일세를 신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네. 이명박 대통령이 모 인사의 건의를 받아 2010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통일세 신설’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는데, 당시 국회에서 반대하였고, 그의 철학과 뒷심의 부족으로 관철시키지 못했지. 또 그 뒤를 이어받은 대통령은 대안으로 만들어 놓은 ‘통일항아리’조차도 없애버렸네. 그 때만 시작했어도 지금 통일비용이 많이 모였을 턴데, 참 안타까운 일이야.”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통일세를 추진한다면 어떤 장점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네.”
강 기자가 통일세의 신설에 대해 동의하며 말했다.
“우리 정부에게는 통일에 대한 자신감을 줄 것이고, 통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거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통일의 시기가 오더라도 차분하게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지. 그리고 정부가 교체되어도 통일정책을 단절 없이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줄 수 있을 것이네.”
이대한이 정부에 도움이 될 요소를 짚었다.
“우리 국민들에게는 나도 통일준비에 참여하고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줄 것이네. 통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잊을 수 있게 해주지. 국민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통일정책에 신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네. 자연히 급격하게 지불해야 하는 통일비용 때문에 통일을 반대하는 국민들이 줄어들게 되지.”
김상웅이 국민의 자부심을 강조했다.
“북한 김정은과 그 체제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네. 북한지도자들은 남한에서 통일을 실질적으로 준비하고 있으니 제대로 북한을 통치하지 않으면 흡수통일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될 것 아닌가. 평화통일을 앞세우는 그들의 위장전술에 쐐기를 박을 수 있지. 이만한 적극적인 심리전이 없다고 보네.”
황만주는 북한에 경고 효과가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참 좋은 생각이야. 나는 북한 주민의 입장에서 말하고 싶네.”
조용히 듣고 있던 강 기자가 나서며 말했다.
“북한주민에게는 동경과 안도의 대상이 될 수 있지. 남한 국민들이 북쪽 동포들을 위해 통일세를 신설하여 준비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북한주민들은 통일이 오더라도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될 수 있다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지. 따라서 위기의 시기에는 우리 쪽을 바라보게 할 수 있다고 보네.”
“세계의 다른 나라를 향해서는 통일을 준비하는 대한민국의 의지를 알릴 수 있지. 대한민국이 이렇게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통일을 준비하고 있으니 통일을 지원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지. 미국과 중국 등 주변 국가들이 결정적인 통일의 시점에서 통일을 반대할 명분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네.”
이대한이 외교관의 입장에서 말을 받았다.
“오빠들! 나도 한 말씀 드리면 안 되나요?”
“우리 신 대표의 이야기도 당연히 들어봐야지.”
“통일세는 모든 국민과 통일을 준비하는 관계자들에게 통일이 먼 미래의 과제가 아니라 바로 현재 진행형의 우리의 과제라는 인식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즉 후손들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짐이 아니고, 바로 우리 세대가 준비하는 당면과제라는 주체의식을 갖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통일세의 거출 방식인데요. 국민들은 직접세에 부담을 느낄 거예요. 경제가 어려워지면 그 부담은 더욱 커질 수 있지요. 따라서 부가가치세와 절충하여 간접세의 형식으로 큰 부담 없이 거두는 방안이 최선의 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야가 합의해서 통일세 항목을 신설하여 조금씩 모아 간다면 통일의 종자돈이 될 것 같아요. 평화통일을 열망하고 이를 준비하는 우리라면,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통일세 논의를 활성화하여 이를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통일에 대비한 통일비용을 조금씩 준비해나갈 때 통일은 소리 없이 우리에게 다가 올 거라고 확신해요.”
신 대표의 제안에 친구들은 동의를 한다는 뜻으로 큰 박수를 쳤다.
“우리 친구들 제안이 너무 좋아요. 특히 신 대표는 식당일 그만 두고 국회로 가야 되겠어.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를 내가 정리를 해볼까 하네.”
강 기자가 친구들과 신 대표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희망하는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가오는 냄새가 나네. 평화통일은 우리 조국의 숙원이며 과제가 아니던가? 지금은 대부분의 국민이 통일을 당연시하고 있으며, 그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네. 우리가 일류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평화통일이 전제되어야 하네. 통일은 북한의 핵과 인권문제 등을 완벽하게 해결 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네. 통일은 우리가 21세기에 반드시 풀어야 할 족쇄요, 넘어야 할 장벽이지. 이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다음 세대에 일류국가로서 본격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네.
지금까지 이야기한 대로 독일통일은 흡수통일이 아니라 동독주민 스스로의 선택과 서독의 수용에 의한 자발적인 편입통일이었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989년 11월 이후 1990년 3월의 자유총선 때까지 동독주민들은 스스로의 토론과 선택을 통해 서독 체제에 편입하는 방식으로 통일을 하기로 합의했었지. 그리고 서독이 주도하는 통일과정에 기꺼이 동참하기로 동의했었네.
남북한과 동서독은 역사와 사회 및 국제적인 맥락에서의 상이성과 분단 상황에서의 유사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 따라서 독일의 통일과 교류협력의 경험을 한반도에 적용할 경우에는 조심스러운 접근태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일세. 특히 교류협력과 관련해서 보면 양 지역의 상황 차이는 대단히 크기 때문에 독일의 경험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 그러나 우리의 대북정책이 남북한 화해협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사실상의 통일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을 찾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보네.
독일통일은 준비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고도 장기적인 준비의 산물이었지. 1970년대 중반 이후 서독은 통독 직전까지 연 평균 23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의 동독 지원을 지속적으로 실시했네.
우리도 우리의 주도하에 평화통일이 가능한 상황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보네. 우리는 북한 내 민주개혁세력이 부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북한 주민의 통일 지향 의식을 확산시켜야 할 것일세. 북한주민들이 남쪽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하지. 현시점에서는 북한주민들의 대남 적대의식의 약화 및 국내외 통일 지지기반의 강화 등을 주도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독일통일 당시 독일의 콜 총리의 말처럼 기차는 한없이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을 걸세. 통일이 언제 다가오든 힘차게 낚아챌 수 있도록 하나하나씩 준비해나간다면 우리는 훌륭하게 통일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일세. 골드만 삭스의 예언처럼 2050년에는 세계 최강의 나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야. 김 회장이 이야기한대로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의 통일을 위해 ‘통일세’는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네. ‘통일세’를 모으는 순간부터 우리는 통일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일세.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걷어내기 위해 첫 발을 용감하게 내딛어야 하네. 미래는 준비된 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또한 통일에 앞서 주변국들과 군사적 문제, 영토 문제, 주권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쟁점에 대해 논의해야 하네. 대한민국과 관련국 간의 관계, 북한과 관련국 간의 관계를 각각 따져보고 통일 한국과의 새로운 국제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은 꼭 필요한 것일세.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국의 통일에 반대하는 국가도 나타날 수 있을 것이네. 이에 대해서는 소련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반대를 저지하고 통일을 이룬 독일의 선례처럼 현명한 외교 전략을 통하여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네.
전략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느 길을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고, 전술은 정한 길을 어떤 방법으로 갈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라 하였네. 안타깝게도 이 나라엔 전술가들은 많아도 전략가가 드물다고 생각하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우리가 이 나라에 빌리 브란트와 같은, 헬무트 콜과 같은, 등소평과 같은 대전략가로서의 역할을 하세. 오늘 참 중요한 이야기를 했네. 친구들!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세. 고맙네. 우리 마지막 잔을 들고 건배를 하세. 우리 사랑스런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강 기자의 종합적인 의견과 제안에 친구들은 잔을 들고 힘차게 건배를 외쳤다.
“위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된 독일에서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한 토론은 식사 후 3시간이 지난 11시경에야 끝났다. 신 대표는 오빠들이 토론하는 과정에서 틈틈이 낙지, 봄나물 무침과 김치부침개 등 맛있는 요리를 내 놓았다. 정읍의 특산물인 복분자 주와 자생녹차는 물론이고, 홍쌍리 매실농원의 매실차 등의 시원한 음료수도 장시간 지속된 토론의 활력을 주는데 기여했다.
“자랑스런 오빠들! 우리 헤어지기 전에 다함께 손잡고 ‘통일아리랑’ 제1절을 불러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우리 다함께 손잡고 가서
통일을 이루어 잘살아 보세
아리랑 아리랑 통일아리랑
통일의 고개를 잘 넘어 간다
아리 아리랑 통일아리랑
통일의 고개를 잘 넘어 간다
친구들은 호남농학을 대표하는 정읍우도농학을 전수한 후, 명창의 길을 가다 사업가로 변신한 신 대표의 제안에 따라 서로 손잡고 ‘통일아리랑’을 흥겹게 불렀다.
강 기자는 모임이 끝난 후 새벽까지 친구들과 토론한 내용을 바탕으로 ‘통일세의 필요성과 역할’에 대해 기사를 썼다. 그 다음 날 대부분의 방송과 매체에서 이 기사를 받았다. 정치권에서 이명박 정부 때 도입하려다 실패한 ‘통일세법’을 후일 이조국 정부에서 도입하는데 촉매제 역할을 한 특종기사가 되었다. <계속> hjy20813@naver.com
*필자/하정열.시인. 화가. 예비역 소장.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