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제 사마염은 AD280년에 오왕조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자마자 화북을 중심으로 지배질서의 회복과 농업생산의 부흥을 시도했다. 점전제와 과전제라는 토지제도를 실시하고 호조식(戶調式) 세제를 반포하였다. 일반적으로 점전은 토지의 점유면적을 규정한 것으로 관품규정이 따로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일반 농민에게 남자 70무 여자 30무를 점전으로 하였다. 이것은 국가가 토지를 점유할 수 있는 한도를 규정한 성격의 토지제도였다. 이는 서민의 계층분화를 방지하는데 목적이 있었으며 서민에게 경작의무를 부과하고 과역을 부담시키는 토지제도였다. 따라서 과역의 부담이 없는 귀족에 대해서는 과전의 규정도 없었다.
서민은 16-60세인 정남(丁男)일 경우 50무 정녀는 20무 13세에서 15세 및 61세에서 65세에 속하는 차정남(次丁男)은 25무가 과전액이었다. 그리고 이 과전액을 기준으로 하여 전조(田租) 속(粟) 4곡 정녀는 1곡6두 차정남은 2곡을 납부했고 호조식으로는 정남호(丁男戶)일 경우 호당 명주 3필과 무명 3근 여자와 차정남의 호는 그 반을 부담하였다. 결과적으로 점전제와 과전제는 일반 농민 1호 당 약 100무의 전토를 확보할 수 있게 한 대신에 70무 정도를 기준으로 하여 엄격히 조세를 징수하였다.
이와 같은 토지제도는 생산력의 회복에 효과가 있어서 당시 국가가 파악한 대진국의 호수는 245만에서 377만이었다. 그러니 그때 인구는 대략 1,500만 명 정도였을 것이다.
한실 말엽 이래 군웅이 할거하여 분열이 심화되어 국가가 국가다운 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진은 AD265년에 즉위한 진제 사마염의 집권 시기를 제외하고, 황권은 계속 약화되었다. 황권의 약화는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야심가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살인약탈방화가 빈번했다. 결국 국가는 유례없는 대혼란에 빠지고 대내전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런 국면을 조성한 원인은 진제 사마염이 3가지 저급한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첫번 제후왕을 분봉한 것이다. 사마염은 황제에 즉위할 때 나이 겨우 19살이었다. 경력이나 견식에 일천했다. 그는 자신의 조손3대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조조가 세운 위나라가 종실의 역량이 박약했고 강한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주나라의 분봉제도를 따라서 종실의 27명을 제후왕에 봉하였다. 그러나 오나라를 멸하고 다시 조서를 내려 주군병(지방군)을 해체하고, 지방정부는 더 이상 군대를 관할할 권한이 없게 만들었다. 비록 그 후 사마염이 제후왕을 방비하려는 노력을 한 바 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봉건제도란 일단 한번 확립되면 반드시 제후왕의 세력을 꺾지 못한다.’
27왕들은 몇몇을 제외하고 뒤질세라. 경제력과 군사력의 확장에 나섰다. 이에 중앙정부는 허깨비가 되어 가서 그들을 제어하기 어렵게 되었다. 진제 사마염이 죽자 제후 왕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하여 16년에 걸친 내전을 벌렸다. 국가는 졸지에 피비린내 나는 투쟁에 말려들고 백치황제 사마충이 그 실권을 황후 가남풍에게 내어 주자 혼란은 더욱 더 가중되었다.
이를 돌이켜 보니 서진의 통일로 국가의 기능이 잠시 극복된 듯 보였으나 그것도 겨우 진무제 사마염이 집권한 1대에 불과했다. 진무제는 천하를 통일하자마자 열락을 즐기며 후궁을 1만 명을 넘게 두었다. 진무제는 초기에는 정사에 관심을 가지고 백성들을 보살폈으나 황음에 깊이 빠져 정치에 대한 열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지방호족의 발호로 끊임없이 유민이 발생하였고 분권적인 통치가 형성되어 제왕들이 조정을 무시하고 군사력을 크게 확장하는데 혈안이 되어버렸다.
‘제왕들이 권력을 희롱하며 날뛰는 세상이 벌어지고...’
이들 제왕들은 봉토와 2만호에서 5천호 식읍을 받고 군대를 가지고 각종 장군직과 도독의 직책을 겸하여 지방군부의 병력을 장악했다. 이것은 나중에 진무제의 뜻과는 달리 분권적인 경향을 가속화하여 8왕의 난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으로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여기에다 무제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외척 양준이 등장함으로써 정치상의 부패가 가속화되었다.
‘삼양의 매관매직이 사마씨 정권의 멸망을 부채질하였다.’
양준과 양요 그리고 양제 3형제를 삼양(三楊)이라 불렀다. 이들 철면피들은 뇌물로 정치를 전횡하였다. 그래서 건국 당시의 관료들을 추방하고 조정과 궁중의 요직에 자신들의 심복을 배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귀족들은 사마씨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양준은 진무제의 황후인 양황후의 아버지로 자를 문장이라 하였다. 그는 진무제가 죽자 태부가 되어 조정의 정사를 전횡하였다.
양준이 죽어가는 무제 곁에서 밤을 새워 간병을 하자 진무제가 병석에 누워서 양준을 가까이 불러 이르기를
“짐의 명이 경각에 다다른 것 같소. 태자의 일을 경에게 부탁하니 경은 내 뜻을 저버리지 말고 충성을 다하여 주시오. 후사는 내일 여남왕 사마양을 불러 맡길까하오.”
이에 머리를 조아리고 아뢰기를
“폐하께서는 부디 심려치 마시고 용체를 보존하시어 억조창생의 바램을 헛되게 하지 마옵소서. 소신은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입니다.”
무제는 겨우 고개를 끄덕인 채하였으나 곧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5세로 재위 25년이니 태강 11년 경술 4월이었다. 무제가 붕어하니 양준은 망극지통(罔極之痛)한 표정을 지으면서 딸인 양황후와 상의하여 매사를 다 처리해 나갔다. 진무제가 붕어하고 다음날 아침 양준은 황후의 명으로 태자와 백관을 불러 국상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무제의 칙지를 거짓으로 꾸며서 태자 사마충으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했다. 그리하여 사마충이 등극하여 진혜제라 하고 연호를 연희 원년이라 고쳤다.
혜제는 무제의 장례를 마치고 외조부 양준을 태부로 봉하고 정사를 섭정케 하였다. 그리고 태자비 가씨를 황후로 삼고 아들 휼을 태자로 책봉하고 재인사씨(才人謝氏)를 태자비로 삼았다.
이때 여남왕 양은 사마중달과 복씨부인 사이의 소생으로 허창에 진수하여 예주의 군마를 총독하고 있었다. 그는 무제의 신임이 있어 생전에 자기에게 정사를 맡길 뜻을 흘린바 있었다. 그래서 은근히 정권을 잡을 날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무제가 붕어하자 양준이 하루 밤 사이에 정사를 독점하므로 닭 쫓던 개꼴이 되고 말았다.
양준은 일찍이 여남왕 양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혜제를 업고 처리했다. 그리고 중대한 일은 모두 다 칙명으로 방패를 삼아 정사를 펼치자 이를 누구든지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양준은 조정을 출입할 때도 철갑병 3천으로 호위케 하자 사마양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양준은 사마양이 영지로 돌아가지 않고 허창에서 계속 머물자 불안하여 그에게 칙명을 내리기를
“여남왕 양은 국상이 끝나고 혜제가 등극한 지도 여러 날이 지났는데 어찌하여 도성에서 세월을 보내는가. 조속히 영지로 돌아가라.”
이에 사마양이 양준에게 대답하기를
“삼가 어명을 받자와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폐하를 배알하고 가고 싶소.”
“그럼 기다리시오. 내가 폐하께 주달하여 보리다.”
양준은 아주 시원하게 대답하였으나 내전으로 들어간 척하다 말고 다시 시간을 끌고 돌아와 싸늘하게 말하기를
“폐하께서 용체가 불편하시어 누워 계십니다. 배알하는 것은 필요치 않으니 그냥 떠나라 하십니다.”
사마양은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어 조정에서 나와 생각해 보니 양준의 간계가 불쾌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사마양은 그날 밤 뜻이 맞은 형제와 대신들을 은밀히 불러오게 하였으나 곧 양준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양준은 신속히 철기군 5천을 풀어 사마양의 집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막고 명하기를
“아우는 들어라. 여남왕과 아무도 통하지 못하게 각별히 유의하라!”
이에 늦은 밤까지 동지들을 기다리던 사마양은 거리에 경계망이 구축되어 양준의 마수에 걸린 것을 알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여남왕은 그날 밤을 하얗게 새고 허창으로 달아났다. 양준은 여남왕이 떠나자 아린 이가 빠진 것 같이 편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농락하였다. 이리하여 양준의 권세는 천자를 능가하고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그는 범부에 불과하여 정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대의명분을 잃을 때가 많았다. 양준의 정사가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조정 대신들의 빈축을 크게 샀다. 그러나 백치황제는 말이 없었으나 세상은 조용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정사가 확연히 헛바퀴를 돌자 양준은 한 계책을 생각하여 혜제에게 주달하기를
“폐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후로 태평성세의 치세라서 백성들의 격양가가 높으니 폐하의 홍복인가 합니다. 이런 때에 폐하께서는 백성에게 부역을 줄이고 군신에게 관작을 더하시면 성덕이 사해에 진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백성은 성은에 감복하여 나라를 위하여 더욱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양준이 이리 아뢰자 황문장군 부기가 아뢰기를
“양태부가 아뢴 대로 시행하자면 법도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유사에게 조서를 내리시고 중신에게 평의케 하여 그 결과를 참작하여 조처하옵소서.”
부기가 조리 정연한 의견을 내자 상서 위관이 양준을 향하여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부왕의 상을 입은지라 신하된 자가 어찌 녹위를 논한단 말입니까? 전혀 이치와는 먼 말씀입니다. 하오니 양공께서는 이 같은 예법에 어긋난 말씀을 거두십시오.”
대신들이 의견을 주고받는데 우매한 혜제는 멀건이 바라만 보고 있다가
“너무 잔말이 많은가 보오. 태부께서 알아서 처리하시오.”
톡 쏘아 한 마디 던지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양준은 몇몇 대신들의 직언을 묵살하고 자기 소신대로 이 일을 천하에 공포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에게 후한 녹위를 내리니 심복인 장소를 태위에 봉하여 금군을 관장케 하고 충직한 장화와 화교를 태자의 보익을 맡아 동궁에 나가 있게 하였다. 그리고 동생 양제와 심복 하소 왕융 배계도 동궁에 나가 태자 휼을 가르치게 했다. 양준은 또 가황후의 마음이 간악하고 독한지라 이를 두려워하여 자기 생질 단광을 환관을 만들어 가황후의 시중을 들게 했다.
어느 날 화교와 장화가 태자를 따라 혜제에게 문후를 드리려고 왔다. 그때 가황후가 수렴 뒤에 있다가 혜제에게 속삭이기를
“화교는 전에 선제께 아뢰기를 폐하는 대통을 이을 그릇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하문해 보십시오.”
이에 어리석은 혜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화교에게 묻기를
“경은 지난 날 짐이 대통을 이을 재목이 아니라고 선제께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어찌 생각하고 있는가?”
“황송하옵나이다. 분명코 소신이 선제께 그리 아뢰었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 말의 효험이 없음은 이 나라의 홍복인가 하옵니다.”
혜제는 어렵지 않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묘한 표정을 지으며 황후를 바라보고 입을 열지 않았다. 혜제는 사마씨 혈통에서 가장 열성 인자로 태어난 모양이다. 어느 날 진혜제 사마충이 어화원에서 놀고 있었다. 개굴, 개굴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사마충은 좌우에 시립해 있는 태감에게 물었다. “저 개구리는 관부(官府)을 위해서 우는가? 아니면 사가(私家)를 위하여 우는가? ”
이런 기가 막힌 질문을 받은 태감주의 한 사람이 머리회전이 상당히 빨랐던지 곧장 대답하기를
“폐하! 개구리가 관청 땅에서 우는 것은 관청을 위하여 우는 것이고, 백성의 땅에서 우는 것은 백성을 위하여 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태감은 우문현답을 내어 놓았다. 이것은 궤변이기는 하지만 천하의 주인인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너무나도 유치하구나. <계속> wwqq1020@naver.com
*필자/남양자 이순복.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