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에 따르면, 세계 유력매체로 꼽히는 파이낸셜타임즈(The Financial Times)가 「제주해녀(The Sea Women of Jeju)」라는 제하로 지난 9월 5일자기사에서 제주해녀의 삶을 집중 조명했다고 밝혔다.
이번 기사에서 파이낸셜타임즈의 Simon Mundy 기자는 ‘제주해녀는 세계의 이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며, 그 문화의 독특함을 전세계에 타전했다.
물질작업에서 시작하여 전통과 역사, 삶 등을 아우르는 현장 스케치를 통해서 제주해녀문화가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80대이상 고령의 해녀 인터뷰 등을 통해 제주여성의 강인함과 독립성도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번 기사는 3/2분량의 지면에서 다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ft.com/jeju-divers)상에도 영상으로 게재,소개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세계적인 언론에 제주해녀가 긍정적으로 조명되면서, 제주해녀의 UNESCO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등재, 국가중요어업유산 지정 등에 시너지효과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즈의 구독층이 중․상류 오피니언리더층임을 감안했을 때, 고품격 제주문화 이미지 홍보를 통해 향후 체류형 개별여행객 유치에도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파이낸셜타임즈는 1888년 영국에서 창간되었으며, 미국 월 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과 함께 경제분야를 이끌어가는 세계 양대(兩大) 일간지로 영국 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 아시아 주요지역에 배포되고 있다. 발행부수는 일일 약 45만부로 인터넷 유로독자만해도 50만명이 넘는다.
<번역내용 전재> : 제주해녀(The sea women of Jeju)
수 백 년 동안, 한국에 속한 한 섬의 여성 잠수부들은 해산물 채취로 생계를 꾸려왔다.
사이먼 먼디가 일부는 80대가 된 그 여성들과 곧 과거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가 지긋한 여성들이 매섭고, 차가운 제주 앞바다에서 해초를 매고 수면 위로 올라올 때 특이한 소리를 냈다. 내 왼쪽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염소 울음소리 같았고, 앞쪽에선 인내의 깊은 신음 소리 같았다. 그들은 폐에서 이산화탄소를 빼내기 위해 휘파람도 불었다.
수확물을 주황색 부표에 묶인 자루에 넣은 후 잠수복 차림의 연세 지긋한 그 여성들은 이따금씩 무슨 얘기를 나누고는 1분도 채 안되어 휴식을 접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5시간 동안 이런 리듬을 반복했다.
이들은 최소 17세기부터 해초나 조개류를 채취해온 잠수부인 대한민국 제주의 해녀들이다. 해녀 일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전통 중의 하나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이 전통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전통적으로 직업은 어머니에게서 딸로 전해져 오지만, 최근 몇 십 년 동안 제주의 해안가 동네에서 태어난 젊은 여성들은 제주시나 서귀포시 또는 육지에서의 편안한 삶을 추구하면서 직업으로서의 해녀를 기피하고 있다.
1970년대 14,000명 이상이던 해녀가 지금은 4,500명 이하로 줄었다. 연령대는 주로 50대 이상이고, 90대의 고령자도 있다. 그들은 20대의 젊은 여성들을 뒤로 하고 솜씨를 뽐내며 수중 20미터까지 잠수해서 2분 동안 숨을 참아가며 해녀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이 마지막 해녀가 될 거예요.” 종달리 해녀촌을 관리하는 김홍출 씨의 말이다. “저 분들은 교육 받을 기회가 없어서 해녀 외엔 할 일이 없었지요. 하지만 요즘 젊은 여성들은 다른 직업을 원해요. 우리 마을의 큰 문제입니다.”
해녀들이 물속으로 잠수하니, 해안가에는 엉덩이에 방석을 찬 늙은 남편들만 남았다. 그들은 쭈구리고 앉아서 전날 부인이 잡아온 해산물을 분류하고 있었다.
우리 뒤쪽으로 한 늙은 여인이 해조류를 실은 작은 트럭을 타고 지나갔다.
“권** 할머니 들어가시네요.” 김** 씨가 말했다. “권 할머니는 다른 분들보다 좀 일찍 끝내셨어요. 연세가 좀 있으시거든요. 올해 85세 예요. 권 할머니의 언니분도 지금까지 물질을 하고 계시죠.”
30분 쯤 후에, 1톤이 넘는 해산물과 24명의 해녀를 태운 어선 한 척이 시야에 들어왔다.
남편들이 그들을 마중 나가 채취해온 것들을 건네받고, 해녀들은 배에서 내렸다.
거의 모든 해녀가 남자들을 지나 근처에 있는 탈의실로 타박타박 재빨리 걸어갔다.
제주의 나이든 해녀는 세계의 이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다른 선진국보다 일하는 여성의 비율이 훨씬 적고, 가난한 노인이 많아 국가적 위기까지 이어지는 한국에서 더욱 그러하다.
“한국에서는 보통 남자들이 여자의 생계를 책임지지만, 제주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강** 해녀박물관 큐레이터가 말했다. “해녀라는 직업으로 돈벌이를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립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여전히 옛날 방식대로 살아가지만, 제주의 나이 많은 해녀들은 21세기 트렌드를 따라 살고 있는 셈이죠.”
다음날 아침 나는 종달리 인근 길가 덤불나무 그늘에서 수다를 떨며 쉬고 있는 30여명의 해녀들을 발견했다.
농담 중에, 유**(62세)씨는 육체적으로 힘든 잠수 활동과 물속에서 여러 번 겪게 되는 압력의 변화가 노인들에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물속에서의 운명을 미리 알 수 없어요.” 유씨가 말했다. “심장마비로 많이 죽었어요. 우리 해녀촌에서 가장 최근에 있었던 사고가 2년 전이었죠. 혈중 산소 농도가 너무 많이 떨어지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해서 결국 사망했죠.”
이런 두려움은 통계자료로도 확인된다. 지난 4년간 연평균 9명의 해녀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김씨의 활기찬 응원이 있은 후에 해녀들은 흔들거리는 날카로운 현무암을 밟고
바다로 걸어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입수했다. 나는 그들 근처 물 위에 떠서 해수면에 떠있는 자루와 바다 밑 사이를 끝없이 반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5시간 후에, 여인들은 해산물을 가득 넣어 30Kg 쯤 되는 자루를 들고 비틀거리며 바다에서 올라왔다. 여섯 명의 손주를 둔 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올라왔다. 77세인 오할머니는 스무 살에 물질을 시작해서 반백년 이상 해온 그 마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해녀 중의 한명이다.
“내가 물질을 안 했다면, 감자 농사나 짓고 있었을 거예요. 임신 9개월이 될 때까지 물질했어요.” 한 제주의 역사학자에 따르면 물질을 하다가 배 위에서 출산한 해녀가 있다고 한다. 해녀들은 임신하고도 물질을 나가는 게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 어린 아기를 배의 돛대에 묶어두고 물질을 하기도 했으니까.
역사 기록에 따르면 물질은 원래 제주 남성들의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7세기에 조선의 한 왕이 남성들을 대규모로 징병하면서 여성들의 일이 되었다. 제주에서는 공물로 전복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제주의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해녀는 제주도민들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독특한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강한 제주 사투리는 한국어와는 다른 말이라고 불평하는 육지 사람들도 독특한 해녀 문화의 가치를 인정한다.
제주와 육지의 복잡한 관계는 한국 정부가 제주에서 좌익 세력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과정에서 제주도민의 1/10을 몰살했던 1948년과 1954년 사이에 가장 냉랭했다.
“정말 힘든 시기였어요.” 80세의 안** 해녀가 그때를 떠올리면 말했다. 이호 해변의 북쪽 마을에서 그물 자루를 손 보고 있던 안 할머니를 어느 날 만났다. 남편은 그 사건으로 몸이 불구가 되어, 그녀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곧 하던 일을 마치고 스쿠터로 조심스레 걸어가서는 그걸 타고 떠났다.
그 후에 나는 해녀들이 일하고 있는 근처 바다로 걸어갔다. 그들 중 해초를 한 움큼 집고 흔들며 미소를 짓는 한 명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름을 물었다. “두노, 83살.”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수 백 년 동안, 해녀들 사이에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물질이 얼마나 고된 지를 보여주는 노동요가 그 중 하나이다.
“쉽지 않은 것이 물질이네, 내가 바다로 들어가면 저승이 다가왔다 멀어졌다 하네. 나는 밥 대신 바람을 먹고, 파도가 내 집이네.”
‘아직도 이승이네’라는 표현은 한국의 독특한 샤머니즘을 보여준다. 매월 2월에 제주에 있는 모든 해녀들은 바람의 여신인 영등할망에게 감사하며 소원을 빌고, 영등할망이 섬을 떠날 때 짚 배를 함께 바다로 떠나보낸다.
“그들은 정말로 그 신들을 믿습니다. 신들이 해녀의 숨을 참을 수 있게 해준다고 믿습니다.”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해녀를 연구하는 좌** 연구원의 말이다.
하지만, 해녀의 삶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했다. 제주의 동쪽 해안에 있는 고급 리조트 근처에서 만난 박**씨의 말이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한 국제회의의 참석자들 몇 명이 사진을 찍으려고 근처의 등대 쪽을 거닐고 있었다. 그들은 햇볕에 해초를 말리는 박씨와 다른 해녀 4명을 힐끗 힐끗 쳐다보았다.
1945년에 태어난 박씨는 15살에 해녀가 되어 23살에 결혼하기 전까지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서 물질을 했다.
“육지 남자와 결혼했으면 좋았을 텐데, 제주 남자들은 여자가 모든 일을 해줘야 해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박씨는 1970년대에 정부가 해녀의 잠수복을 지원해주면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그 전에는 겨울에도 헐렁한 면 옷을 입고 물질을 했다. “정말 힘들고, 추웠어요.” 그 고통을 표현하며 쾌활했던 말투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냥 했죠. 우린 어렸으니까. 하지만 한 번에 한 두 시간 이상 일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해녀박물관의 강씨에 따르면, 잠수복은 해녀들이 물속에 더 오래 있을 수 있게 하여 그들의 수입을 올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물질을 할 수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강씨에 따르면, 가장 생산적인 해녀는 1년에 3천만원($25,000)까지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하지만 제주도는 그것의 절반 이하로 추정한다. 해녀들은 바다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계절 별로 정해 놓은 채취 금지 기간을 지키며 봄과 겨울에 띄엄띄엄 일을 한다. 농사 등의 부업으로도 수입을 올린다.
그들의 재정적 독립성은 노인 가난 문제가 심각한 한국에서 특히 눈에 띄는데, 한국에서는 65세 이상 한국인 중 49%가 평균 소득 이하의 돈으로 살아간다. 이는 선진국들이 가입된 OECD 회원 국가 중 가장 높은 비율이다. 이 문제는 1990년 이후 노인 자살률을 5배 가까이 끌어올렸고, 이 역시 선진국 중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인다.
하지만, 이런 가난과 절망은 고** 할머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녀는 잠수 장비를 가득 실은 유모차를 끌고 세 딸이 조그마한 섬인 비양도 바다에서 물질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86세의 고씨 할머니는 올해 해녀가 된 지 딱 70년이 되었다. 요즘엔 한 달에 열흘 이상 물질을 나가지 않고 있고, 오늘은 52세에서 60세 사이의 세 딸만 물질을 하고 있다.
집에 돌아와서, 자매들은 수확물의 무게를 쟀다. 첫째 딸이 경쾌한 목소리로 불룩한 자루들의 무게를 재어 눈금을 읽었다. 모두 더해서 두 시간 동안 110Kg의 해초를 채취했다. 이 해초는 1Kg에 1천원에 팔린다. “난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할 거예요.” 고씨 할머니의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이다. “물질을 배우는 젊은 여성이 없어요. 아마 30년 후에 우리 문화는 사라져버릴 거예요.”
하지만, 물질의 특성상 띄엄띄엄 일을 하기 때문에 90세에 접어드는 고씨 할머니도 재정적으로 독립될 수 있었다. 이런 특성은 새로운 세대를 끌어 들이는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제주의 남쪽 해변에 있는 그녀의 고향에서 나는 31세의 채** 해녀를 만났다. 그녀는 몇 안 되는 젊은 해녀 중 한 명이다.
채씨는 처음엔 해녀라는 직업을 피했다. 10여 년 동안 서울에서 미용사로 일했었다. 하지만 한국의 다른 여성들처럼 일을 하며 엄마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하는 게 쉽지 않았다.
바다에서 물질하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보고 자란 그녀는 아직 육지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과 따로 살아야 했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가업을 이어나가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자유 시간이 많아요. 파도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일하고, 깨끗한 미풍을 즐기고 있죠. 미래에 우리 같은 사람이 많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완전히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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