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속에 익어가는 사랑
북한의 5월은 보릿고개다. 남쪽에서는 벌써 반세기 전에 보릿고개란 말이 없어졌다. 북한은 김일성 시대부터 ‘쌀밥에 고깃국’을 구호로 내웠지만, 80년이 넘도록 아직 이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 가뭄이 겹친 올해 북쪽의 5월은 너무 참혹했다. 금년 3월에 특사간의 만남을 통해 남쪽에서 식량 50만 톤을 긴급지원을 받고 있지만, 부족한 식량은 100만 톤 이상이 되었다. 김정은 정권은 고갈 난 외화 때문에 추가적인 식량을 구매할 여력이 없었다. 5월 들어 군대에 배급되는 식량도 반절로 줄어들었다. 평양시민들에 대한 제한적인 배급마저도 완전히 끊겼다.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이 재연되고 있었다.
1990년대는 선군정치를 내세운 김정일의 무력통치로 고난의 행군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이번 사태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있다는데 김정은과 그 친위세력의 고민이 있었다. 양강도와 자강도를 포함한 촌구석에 이르기까지 빵을 달라는 시위가 이어졌다. 북한 당국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공안병력을 투입하였으나 유혈시위로 확산되며 불안감은 증폭되고 있었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 지역에 군부대가 추가 배치되었다. 경계강화와 탈북자에 대한 공개사형 등의 조치도 더욱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원하는 북한주민의 탈주는 계속되어 통제 불능사태로 발전하고 있었다. 김정은 정권이 이를 막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장마당과 손전화기를 통해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국 각지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김정은과 친위세력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었다.
|
개성공단 지역의 북측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과 국가안전보위부는 이러한 소문을 차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북한 근로자 사이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휴가가 차단되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집안의 누가 탈북해서 중국에 잡혀 있다더라. 친척 누가 굶어 죽었는데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있다더라.’는 소문은 그들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들은 남쪽 기업의 호의로 이곳에서 그나마 배불리 먹으며 일할 수 있다는데 위안을 느끼면서 분노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당중앙에서는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과 국가안전보위부의 두 채널을 통해 매일 수많은 지시사항을 하달하였다. 작년 만해도 작업의 효율성을 높여 임금인상을 위한 노력을 강화하라는 행정차원의 지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개성 주민이 남쪽으로 탈북하고 북한의 시위가 확산된 이후로는 근로자들의 통제를 강화하라는 지시가 주로 내려오고 있었다.
김지혜는 각 공장건물을 하루에 두 번 이상 다니며 근로자들을 격려하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통상 세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우선 작업반장 등을 통해 근로자들의 근로상태를 파악하였다. 기숙사로 복귀한 후에는 점호시간을 통해서 그들의 정신상태를 점검하였다. 마지막으로 본인이 직접 각 현장을 방문하여 눈으로 확인하였다. 그러나 1만 여명에 가까운 근로자를 확인하고 점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개성에 거주하는 근로자들은 근무 후 바로 집으로 퇴근하기 때문에 점호시간을 활용할 수도 없었다.
사상으로 무장되고 사명감이 넘치던 김지혜에게 점점 정신적인 피로가 쌓이기 시작했다. 특히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다가도 그녀가 나타나면 후다닥 흩어지면서 흘겨보는 눈초리는 그녀를 괴롭혔다. 봄이 되고 부터는 그녀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왕따를 시키려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나마 강민국을 만나는 일은 그녀를 설레게 하는 일과가 되었다. 그녀는 잠자리에 들 때마다 불현듯 강민국의 얼굴이 떠올라 혼자 얼굴을 붉히곤 했다. 그녀는 피로가 몰려오는 오후 4시경에 강민국의 사무실을 들리는 것이 거의 일과가 되었다. 강민국은 ‘지혜나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컵라면을 대령했다. 컵라면도 요일에 따라 하루는 안성탕면, 그 다음은 신라면, 다음 날은 김치라면 등 매일 색 다르게 준비했다. 김지혜는 남쪽 사회에 라면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을 강민국을 통해 알게 되었다. 라면을 먹고 나면 하루 종일 쌓인 울분을 강민국에게 털어놓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잠깐 졸면서 춘곤증을 달래기도 했다. 그때는 강민국이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 지혜의 머리를 자기의 어깨로 받쳐주고는 했다.
강민국이 사무실에 없을 때는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남쪽 신문을 들여다보는 일도 잦아졌다. 처음에는 남쪽 대통령 사진이 1면에 크게 실려 호기심 차원에서 펼쳐들었다. 대통령이 인사와 사회통합을 잘못해서 국가가 어렵다는 비판일색의 기사였다. 강민국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고이 접어 제 자리에 올려놓았다.
‘아! 남한은 이러고도 하나의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남한 국민들은 자기 대통령을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하고, 욕해도 왜 잡혀가지 않을까? 김일성대학교 재학 시절에 배운 것처럼 이런 혼란한 남한은 벌써 무너졌어야 하지 않는가? 왜 무너지지 않을까?’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때려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날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느 때처럼 강민국의 환한 미소를 기대하면서 사무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평소 알고 지내는 사무실 여직원이 나와 강민국이 지사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올 터이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고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탁자 위에는 믹스커피와 컵라면이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항상 녹차로 대화를 이어갔는데, 어느 날 마셔본 믹스커피의 맛은 그녀를 커피향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것을 강민국이 알아차리고 가끔은 여러 종류의 믹스커피를 내놓았다.
책상에 눈을 던지니 헐벗은 사람으로 가득 찬 천막 내부 사진 한 장이 실린 신문이 눈에 뛰었다. 사진 아래에는 단둥의 탈북난민의 모습이라고 쓰여 있었다. 1면 헤드라인의 제목은 ‘통일세 필요하다’였다. 부쩍 관심이 끌러 무의식중에 신문을 읽어 내려갔다. 김지혜는 탈북난민이 10만 명이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기자는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통일비용을 만들어야 하는데 통일세가 필요하다는 요지였다. 열심히 읽느라고 강민국이 사무실에 들어서는 것도 몰랐다. 신문내용을 읽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보니 강민국이 예의 생글생글한 모습으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그녀는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신문을 접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 이게 무슨 창피한 꼴이람?’
그녀의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지혜나리! 늦어서 미안해요. 지사장님과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졌어요. 그리고 신문은 누구나 읽으라고 있는 거예요.”
강민국은 신문을 조용히 집어 다시 김지혜의 앞에 놓았다.
“앗! 지혜나리가 아직 커피도 안 드시고 있었네.”
강민국은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누르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김지혜를 바라보았다.
“오늘 이 사진이 눈에 띄어 나도 모르게 신문을 집어들었어요. 민국씨! 미안해요.”
그녀는 단둥지역의 탈북난민을 수용하는 천막을 가리키며 몹시 부끄러운 듯 더듬거렸다. 김지혜는 그를 처음에는 ‘강민국동무’로 호칭하다가 어느 날 ‘민국동무’로 부르더니, 얼마 전부터는 ‘민국씨’라고 호칭하고 있었다.
“지혜씨! 전혀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호기심이에요. 아마 지혜씨가 무관심 했다면 저는 엄청 실망했을 거예요.”
처음으로 ‘지혜씨’라고 부르고 나서, 강민국은 설레는 마음으로 김지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우리 지혜씨 배고프시겠는데⋯⋯.”
그는 서둘러 컵라면에 물을 부으며 김지혜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눈길은 탁자위에 놓인 신문의 톱기사에 닿아 있었다. 마저 읽고 싶은 충동이리라⋯⋯.
“지혜씨! 라면이 다 되려면 10분은 기다려야 하니 관심 있는 기사를 더 읽으세요.”
강민국은 신문을 김지혜의 앞에 내밀었다.
그녀는 몹시 부끄러워하면서도 호기심을 버릴 수는 없는지 신문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지혜씨! 김치라면 대령이요!”
강민국의 말에 관련기사를 다 읽고 난 김지혜는 무척 상기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민국씨! 이 신문기사 내용이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김지혜는 톱기사의 제목을 예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요! 한국에서는 허위기사를 내면 신문사에서 그 책임을 지게 되어 있어요. 나도 아침에 읽었는데 아마 사실일 겁니다. 그리고 신문기사를 쓴 분은 제가 제일 존경하는 기자이시기 때문에 제가 보증을 서지요.”
“아니, 그럼 민국씨가 이 기사를 쓰신 강 기자를 잘 아신다는 거예요?”
“잘 알다마다요. 바로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예! 그게 사실이에요?”
“그럼요. 평생을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며 평기자 생활을 하시는 분이시지요.”
“어머나! ⋯⋯. 멋있으시다!”
“그럼, 지혜씨 아버님은 뭐하시나요?”
“⋯⋯⋯⋯.”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지혜는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아하! 지금 대답 안하셔도 되요.”
“⋯⋯. 군인이세요. ⋯⋯.”
“예! 군인이요?”
강민국은 매우 놀라며 반문을 했다.
“그래요. 군인이세요. 아이 몰라. ⋯⋯. 이제 일어나야겠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를 꺼리는 듯 일어서려 한다.
“아유! 지혜씨, 라면은 다 드시고 가셔야죠.”
라면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강민국은 그동안 숨겨두었던 어린 시절과 가정에 대한 이야기 등을 해주었다. 김지혜는 요즈음 개성지역의 분위기가 더욱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내비쳤다. 가끔씩 ‘김정은 물러가라’는 낙서가 발견되고 있고, 소규모 시위도 발생하여 주민들이 체포되고 있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공단에 그러한 시위가 생길까봐 걱정이라며, 이를 감독하는 본인은 근로자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민국은 김지혜의 흔들리는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김지혜는 남쪽의 근로자들을 보면 서로를 존중하며 이해하고, 감독관이 없어도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참 좋다고 했다. 강민국은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토대 위해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자기의 권한을 주장하며,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대한민국의 헌법정신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지혜는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강민국은 지난 주말에 집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가 선을 보라고 했다는 말을 할 때는 김지혜는 몹시 외롭고 슬퍼보였다. 김지혜의 아름다운 눈망울에는 눈물이 스며들었다. 둘은 헤어지기 전에 뜨거운 포옹과 키스를 했다. 3년이 넘는 만남 끝에 첫 입맞춤이었으나, 서로를 껴안고 서로를 바라는 열렬하고 진한 키스였다.
멀리 사라지는 김지혜의 모습과 처음 만난 날의 그녀의 모습이 겹쳐졌다. 공장에 들어선 그녀는 부동자세로 서서 공장시설과 근로자들을 휘 둘러보고 있었다. 비너스처럼 아름다운 모습에 눈이 부셨다. 평양미녀란 바로 이런 여성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생각되었다. 어떻게 이런 여성이 근로자들의 감찰반장으로 올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한 순간이었다. 내가 이곳의 남쪽 공장장인 강민국이라고 소개를 해도 그녀는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고 공장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강민국은 뒤이은 그녀의 날카롭고 야무진 질문과 북한의 억양 그리고 극히 사무적인 행동에서 당당하고 똑똑한 북한전사다운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민국 같은 범인이 범접할 수 없는 묘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김지혜의 발길은 잦아지고 머무는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그녀는 강민국이 보는 데서도 스스럼없이 신문을 들추고,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FM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김지혜는 발랄한 음악을 즐기는 표정이었고, 종종 들려오는 뉴스에도 관심을 보였다. 거의 매일 만나는 그들이었지만, 헤어질 때는 아쉬워하며 서로를 껴안고 오랫동안 키스를 했다.<계속> hjy20813@naver.com
*필자/하정열.시인. 화가. 예비역 소장.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