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세상의 기록을 보존하여 후세에 전 하려 하였던 노력은 원시 시대에서부터 추구하여온 신성한 지혜입니다. 기원전 15,000~12,000년 전에 그려진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기원전 11,000년 전에 그려진 라스코 동굴벽화는 인류 최초의 신성한 회화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소리를 담아 전하려는 무한한 시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류 최초의 목소리를 녹음한 기록이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2008년 3월 27일 뉴욕타임스가 특종으로 보도한 뉴스이었습니다. 당시 기사 내용은 ‘세계 최초의 음성 녹음 기록이 미국 연구팀에 의해 파리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살펴보면 최초의 음성 녹음 기록은 1860년 4월 9일 프랑스 음성학자 ‘에두아르드 레옹 스콧’(Edouard Leon Scott. 1817~1879)이 녹음한 것으로 기름 램프에서 생기는 그을음을 종이 또는 유리판에 씌워 이를 긁어서 음파를 기록하는 원리인 ‘포노토그래프’(phonautograph)를 발명하여 소리 사진과 같은 기록을 남겼던 것입니다.
▲ (좌) ‘에두아르드 레옹 스콧’ (중) ‘포노토그래프’(phonautograph) (우) ‘샤를 크로’(Charles Cros)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러한 소리 사진의 발명자 ‘에두아르드 레옹 스콧’에 대하여 살펴보면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서점을 운영하며 당시로써는 최신 기계기술이었던 인쇄기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직업에서 오는 영향으로 기록의 보존에 많은 관심이 있었던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부터 사용하였던 속기(shorthand-速記)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로 여러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말을 빠르게 문자화하는 필기법인 속기에 대한 연구에서 이러한 말을 음성 그대로 보존하는 방법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속기로 법원과 의회에서부터 다양한 분야에 기록성 업무가 이루어지면서 사람의 손 글씨를 대신하는 기계의 발명이 타자기(Typewriter)입니다. 타자기의 역사는 1500년대에 활동하였던 이탈리아 판화가인 ‘프란시시코 람파제토’(Francesco Rampazetto)의 문자 인쇄기에서 그 기원을 찾게 됩니다. 그는 독일의 구텐베르크에 의하여 발명된 금속활자 인쇄기의 보급에 따라 다양한 서적이 출판되면서 책의 삽화와 문양 등을 판화로 작업한 작가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특정된 예술적 서체 그리고 악보 등을 소량으로 즉시 인쇄가 가능한 타자기의 원형인 기계 ‘scrittura tattile’를 최초로 개발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1714년 영국의 엔지니어 출신의 발명가 ‘헨리 밀’(Henry Mill. 1683~1771)이 최초의 타자기를 발명하면서부터 다양한 타자기들이 등장하였던 것입니다.
‘에두아르드 레옹 스콧’은 소리를 담아 보존하는 연구를 위하여 사람의 청각기관 구조에 이르는 의학적인 분야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생리학자 ‘푸랑수아 롱게’(François Achille Longet, 1811~1871)교수의 ‘생리학 개론’(Traité de Physiologie)의 출판을 맡아 원고를 편집하면서 인간의 청각 기관에 대한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소리를 담아 이를 보존할 수 있는 장치에 관한 발상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인물이 독일의 물리학자 ‘루돌프 코닉’(Rudolph Koenig. 1832~?)입니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공부한 이후 프랑스의 유명 바이올린 제작자 ‘쟝 밥띠스트 뷔욤’(Jean-Baptiste Vuillaume. 1798~1875)의 문하에서 악기제작을 배웠습니다. 이후 음향기기 제작자로 일하면서 음향의 파동에 대하여 연구하였으며 이를 측정하는 기계 ‘압력 불꽃 장치’(Manometric Flame Apparatus)를 발명한 인물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에두아르드 레옹 스콧’의 음성 녹음 기계의 기술적 바탕을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에두아르드 레옹 스콧’이 1857년 3월 25일 소리를 기록한다는 뜻을 가진 ‘포노토그라프’(phonautographe)’를 발명하여 특허를 취득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단순한 음파의 기록장치인 ‘포노토그라프’를 소리가 재생 가능한 발명으로 끌어올린 인물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시인이며 발명가이었던 ‘샤를 크로’(Charles Cros. 1842~1888)입니다. 그는 화학약품으로 동판에 부식성을 이용하는 정밀한 판화 기법안 에칭(etching)을 통하여 컬러사진 구현에 많은 열정을 바친 인물입니다, 이 과정에서 ‘에두아르드 레옹 스콧’이 사용하였던 원본이 쉽게 훼손되는 그을음 기법이 아닌 금속판에 에칭의 원리를 응용하여 소리를 담아 이를 재생하는 기술을 개발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과거의 소리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팔레오 폰(paleo phone)으로 1877년 10월 10일 ‘포노그라프(phonographe)’라는 이름으로 그 작동 원리와 제작 방법을 담은 논문이 발표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샤를 크로’(Charles Cros. 1842~1888)는 초현실주의 선구적 시인으로 평가받을 만큼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학으로 14살 나이에 대학 입학 자격에 합격하여 공부한 이후 과학교사로 근무하면서 컬러 사진의 초기 기술을 최초로 발명한 인물입니다. 이후 음성의 기록과 재생을 할 수 있는 ‘포노그라프(phonographe)’의 원리를 세계 최초로 발명하였으나 상업적인 개발을 이루지 못한 채 46세의 나이로 천재적인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이러한 같은 시점에 세기의 발명가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이 1878년 1월 15일 미국에서 인류 최초의 축음기를 발명하였습니다.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의 원리가 공교롭게도 프랑스 ‘샤를 크로’가 발명한 원리와 같았던 내용에서 천재의 영감은 시공을 초월하여 만나게 되는 것임을 느끼게 합니다. 이는 1876년 2월 14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이 ‘엘리샤 그레이’(Elisha Gray, 1835~1901)보다 몇 시간 앞서 전화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여 세기의 인물로 등장한 내용과 맞닿은 이야기로 그 기술적 원리가 ‘에두아르드 레옹 스콧’ ‘샤를 크로’ 그리고 ‘에디슨’으로 이어진 음성기록과 재생의 발명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좌) 에디슨 (중)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 (우)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1892년 뉴욕-시카고 장거리 회선 개통 장면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와 같은 음성의 기록과 재생을 위하여 많은 연구가 이어져 온 시대적 발전 과정과 기술의 원천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미술작가들에 의하여 발전되어온 판화기법이 중요한 바탕이 되었음을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독일의 판화가 ‘루드비히 폰 지겐’(Ludwig von Siegen. 1609~1680)에 의하여 환상적인 음영까지도 표현하는 ‘메조-틴토(mezzo-tinto)의 ’에칭 기법과 프랑스 화가인 장 밥티스트 프린스(Jean Baptiste Le Prince. 1734~1781)가 사용한 수채화의 빛깔과 같은 동판화 부식법 ‘아콰틴트’(Aquatint)기법이 음성기록 장치의 기술적 바탕에 많은 참고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예술가들의 선구적인 헤아림을 바탕으로 사진술과 함께 서로의 장점을 아우르며 발명된 석판 인쇄술 ‘리소그라피’(lithograph) 기법도 빠트릴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석판화로 부르는 ‘리소그라피’(lithograph)는 기존의 요철기법을 사용하는 동판화에서 발전된 기법으로 탄산칼슘(CaCO3)으로 이루어진 석회암 석판이 기름에 반응하는 특성을 이용하여 평면 석판에 직접 그림을 그려 인쇄하는 기법으로 독일의 극작가이며 작곡가인 ‘알로이스 제네펠더’(Aloys Senefelder, 1771~1834)에 의하여 발명되었습니다. 연극제작의 실패로 많은 빛을 가지고 있던 ‘제네펠더’가 새로운 연극을 기획하면서 당시로써는 경제적 부담이 컸던 다량의 극본제작을 모색하다가 발명한 기법이었던 ‘리소그라피’가 정밀한 지도 제작과 악보의 제작 등에 사용되면서 사진술과 결합하여 ‘포토리소그래피’(Photolithography)기법을 낳아 오늘날 첨단 문명의 씨앗인 반도체산업의 주요한 제조공정으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품은 많은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의 삶이 빚어낸 소중한 이야기를 문자와 사진 그리고 소리로 남기려 하였던 지혜의 연구가 서로 맞물리면서 치열한 경쟁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살피게 된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음성의 기록과 재생이라는 보존적인 연구와 함께 이러한 음성을 있는 그대로 멀리 전달하려는 노력이 바로 전화입니다. 이러한 전화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발명이 있기까지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면 그 바탕에 존재한 많은 연구가 있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면 그는 전화라는 자동직조기계를 발명하였던 프랑스 발명가 ‘자크드 보쾅송’(Jacques Vaucanson. 1709~1782)이 만들었던 자동기계 ‘소화하는 오리’(Digesting Duck)와 플루트를 자동으로 연주하는 나무로봇 ‘오토메타’에 담긴 소리의 재생 원리를 세세하게 살폈던 것입니다. 나아가 오늘날 알파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체스를 두는 자동인형 ‘터키 사람’(The Turk)을 발명하여 나폴레옹에서부터 주요한 명사들과 대적하여 화제를 모았던 헝가리의 귀족 발명가 ‘볼프강 폰 켐펠렌’(Wolfgang von Kempelen. 1734~1804)이 1769년 개발한 ‘말하는 기계’(speaking machine)에 담긴 기술적 바탕의 연구에서 전화라는 세기의 발명이 이루어진 사실이 살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축음기를 개발한 ‘에드슨’과 전화기를 개발한 ‘벨’은 역사적인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1878년 에디슨이 최초로 축음기를 발명한 이후 불완전한 실린더로 인하여 온전한 음향을 재생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접근할 즈음 뉴욕시의 전기 수급에 대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여 발명된 축음기의 상용화가 보류되었습니다. 이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 인물이 ‘벨’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전화의 발명자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야 합니다.
▲ (좌) ‘가드너 그린 허버드’ (중)‘마벨 가드너 허버드’와 ‘벨’ 부부와 자녀 (우) ‘헬렌 켈러’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벨’은 1847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나 문학과 음악에 상당한 감성을 가졌던 그는 ‘에딘버러 왕립고등학교’를 다니다 15세에 자퇴합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진 유명한 웅변술 가문에서 자라면서 그가 12살 때에 어머니가 청력을 잃게 되자 어머니와 소통하는 수화와 함께 어머니에게 전달하는 언어를 간략하게 표현하는 입술 형태를 통한 음향 언어에 많은 연구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라틴어와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스코틀랜드 게일어에 이르는 많은 언어를 음성으로 표현하는 놀라운 재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16살 나이에 스코틀랜드 ‘엘진’(Elgin)에 있는 학교에 음악 교사가 되어 근무하다가 런던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습니다. 벨은 1863년 헝가리의 발명가 ‘볼프강 폰 켐펠렌’이 개발한 ‘말하는 기계’(speaking machine)를 보고 나서 19세 때에 몇 마디의 언어를 구사하는 얼굴 로봇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모든 가족이 캐나다로 이주하여 아버지가 미국 보스턴 농아학교에 초대되어 갔을 때 아버지를 따라가 농아학교에 선생이 되었습니다. 당시 만난 학생이 인간 승리의 상징으로 회자하는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입니다. 태어나 19개월 만에 청각과 시각을 모두 잃은 ‘헬렌 켈러’의 부모가 당시 특성적인 방법으로 청각장애 교육에 두각을 나타낸 ‘벨’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에 ‘벨’이 소개한 가정교사가 ‘퍼킨스 맹아학교’(Perkins for the Blind)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던 ‘앤 설리번’(Anne Sullivan. 1866~1936)입니다. ‘앤 설리번’의 헌신적인 열정으로 ‘헬렌 켈러’가 미국의 명문 ‘래드클리프 대학’(Radcliffe College)을 졸업한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청각 장애 교육에 많은 연구를 하였던 ‘벨’은 보스턴 대학의 교수가 되어 음향과 언어에 대한 여러 연구를 시도하였습니다. 이러한 ‘벨’에게 개인적으로 교육을 받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훗날 ‘벨’과 결혼한 ‘마벨 가드너 허버드’(Mabel Gardiner Hubbard. 1857~1923)입니다. 그녀는 다섯 살 나이에 성홍열(scarlet fever)을 앓은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훗날 ‘내셔널 지오그래픽’사를 창립한 ‘가드너 그린 허버드’(Gardiner Greene Hubbard. 1822~1897)로 당시 미국 사회의 저명한 사회 지도자이었습니다. 그는 청각 장애 교육에 많은 후원을 하였던 인물로 딸 ‘마벨’의 개인 교육을 ‘벨’에게 맡기면서 역사는 새로운 이야기를 낳게 됩니다. 1877년 ‘가드너 그린 허버드’의 딸 ‘마벨’과 ‘벨’이 결혼하였던 해에 만들어진 회사가 ‘벨 전화 회사’(Bell Telephone Company)입니다. 이러한 회사가 성장을 거듭하여 1899년 세계 최대의 통신회사 ‘AT & T’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1878년 에디슨이 최초로 축음기를 발명하면서 ‘벨’의 장인 ‘가드너 그린 허버드’가 투자하여 설립된 회사가 ‘에디슨 스피킹 포노그래프 회사’(Edison Speaking Phonograph Company)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 또한 흥미로운 사실이 많은 내용입니다. 본디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근원이 전화기입니다. 이는 당시 ‘벨’의 장인 ‘가드너 그린 허버드’가 사위 ‘벨이’ 연구를 거듭하던 전화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수화기의 기술적 문제를 ‘에디슨’에게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에디슨’이 수화기의 진동판에서 결정적인 원리를 얻어 축음기가 발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축음기의 상용화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습니다. 이에 ‘벨’이 ‘에디슨’이 개발한 은박 실린더와 달리 왁스로 입힌 실린더를 개발하여 1886년 특허가 취득되면서 상용화된 축음기가 나오면서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되면서 1886년 ‘콜롬비아 레코드’(Columbia Records)사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 (좌)‘말하는 기계’(speaking machine) (중) ‘달빛에’(Au clair de la lune) (우) ‘카미유 생상스’'화석'(Fossil) 악보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러한 치열한 경쟁으로 이루어진 지혜로운 역사의 숨결을 품은 이야기의 최초의 근원이 결국 인류 최초의 음성기록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구적인 소리 사진의 발명가 ‘에두아르드 레옹 스콧’(Edouard Leon Scott. 1817~1879)이 1860년 최초로 녹음하였던 음성이 2008년 복원되었습니다. 미국의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Lawrence Berkeley Laboratory) 과학자들에 의하여 당시의 녹음 음성이 재생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발표된 내용에 의하면 녹음된 목소리는 여성으로 끝부분의 10초 동안 프랑스 민요 ‘달빛에’(Au clair de la lune)를 부른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민요 ‘달빛에’는 프랑스 음악가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 1835~1921)가 ‘동물의 사육제’에서 해골들이 춤추는 죽음의 무도회를 그려낸 12악장 '화석'(Fossil)에 인용된 음악으로 많은 음악가가 소재로 삼았던 민요입니다. 이러한 ‘스콧’의 기록은 1877년 에디슨이 동요 ‘메리의 양’(Mary had a little lamb)을 자신의 음성으로 녹음한 내용보다 17년을 앞선 인류 최초의 음성 녹음기록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에두아르드 레옹 스콧’(Edouard Leon Scott. 1817~1879)에 대하여 많은 기록이 ‘에두아르드 레옹 스콧 드 마틴빌’(Édouard-Léon Scott de Martinville)과 같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 혼란에 대하여 정리합니다. ‘에두아르드 레옹 스콧’은 오늘날의 미국 루이지애나주(Louisiana)의 세인트 마틴 패리시(St. Martin Parish)에 있는 세인트 마틴빌(St. 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마틴빌의 스콧이라는 기록이 존재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틴빌’(Martinville)도시 이야기를 살피게 되면 미국의 근대역사에 담긴 너무나 많은 이야기와 만나게 됩니다. 이어서 이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다음 칼럼은 (144)‘ 영토를 매입한 미국의 역사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