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제가 죽고 혜제가 즉위하자 황태후 양씨와 황후 가씨 사이에 외척의 대립이 크게 벌어졌다. 결국 여남왕 양과 초왕 위의 지원을 받은 가황후가 승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무제의 숙부인 조왕 윤이 군사를 끌어들여 가황후 일족을 살해하고 혜제를 추방한 후 황제의 위를 차지했다. 이에 제왕 경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골육상쟁이 연출되었다.
AD291년부터 306년 사이에 일어난 사마 8왕 간의 권력다툼이 이른바 골육상쟁의 피바람을 일으켰다. 이때 싸웠던 8왕은 여남왕 양 초왕 위 조왕 윤 제왕 경 성도왕 영 장사왕 예 하간왕 옹 동해왕 월이었다.
8왕의 난은 7명의 제왕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혜제도 독살되었으며 AD306년 동해왕 월이 회제(懷帝)를 세우므로 해서 패권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8왕의 난으로 여러 왕들이 다투며 자기 힘이 부족하자 북방 유목민의 무장병력을 끌어들여서 서진이 멸망하고 화북을 오호(五胡)가 장악하게 되었다. 이것이 역사서가 말하는 이른바 5호16국시대인 것이다.
혜제가 즉위하고 나서 양준이 실각되고 가황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치는 가운데 장빈3형제 황신형제 조개형제와 그들의 어린동생을 등에 업은 급상 등 10명이 한중을 무사히 탈출하여 옹주와 양주의 접경지역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장빈과 급상의 등에 업혀 다니는 조늑이다. 조늑은 나중에 석현의 양자가 되어 석늑이란 이름으로 후조의 황제가 되어 중국대륙을 통일하는 역사적인 큰 인물로 이 책에서는 처음부터 석늑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이 후조통일의 성공은 제갈공명보다 한 수 위인 천하모사 우후 장빈의 공적이 뒤에서 끈덕지게 작용했다. 이제 천하를 횡행하며 펼쳐질 이들의 파란만장한 주유천하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장빈 일행과 만나는 사람은 다 같이 느끼기를 그 일행이 체구가 월등하게 크고 건강하고 풍모가 빼어나고 비범해 보이자 신분을 의심했다. 마치 도적이나 역도가 아닐까 의심하여 숙식을 해결하는데 여간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이들은 몸에 지닌 병장기를 버리고 단도 하나를 몸에 숨기고 옹색하게 방랑을 시작했다. 여러 날 만에 장빈 일행은 하서 땅 흑망판에 당도하여 숙식을 해결하고자 헤매었다. 하지만 마땅한 먹을 곳을 찾지 못하고 날이 저물었다. 하필이면 인가가 전혀 없는 흑망판에서 밤을 만나게 되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흑망판은 글자가 말해 주듯이 사람이 사는 집이 없고 황량한 벌판이다 그 벌판 넘어 언덕바지에는 버드나무가 울창하여 음산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벌판과 숲속은 고요하기 짝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괴이한 기운이 감돌았다. 장빈 일행은 날이 저물자 갈 바를 모르고 망연히 사방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때였다. 버들나무 숲속에서 고각소리를 울리며 괴도의 무리가 나타났다. 앞선 괴인은 8척 장신으로 범의 수염과 같은 턱수염이 빽빽이 돋았는데 누런 수건을 쓰고 있었다. 녀석은 2자루 개산활부를 들고 허리에는 쌍칼을 꽂고 있었다. 그 뒤에는 9척 장신으로 검은 수염이 얼굴에 가득한 곰과 같이 생긴 건강한 괴한이 보였다. 그는 대도를 들고 어깨에는 활을 매고 있었다. 그 괴인 뒤로 100여 명의 괴도들이 병장기를 들었는데 하나같이 불량해 보였다. 앞장 선 괴인이 달려오며 버럭 같이 크게
“무엇을 하는 놈들이냐? 냉큼 가진 물건을 모두 내어 놓아라!”
소리치며 기세등등하게 다가오자 장빈은 아주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이들 괴인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한중의 장사치요. 난리 통에 밑천을 몽땅 털리고 진주에 있는 집으로 가는 길이오. 가진 것이 없어 저녁요기도 못했소. 장군께서는 우리 같은 장사치를 불쌍히 여기시어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장빈이 괴수를 장군이라 높여 불러 주며 말했으나 괴수는 장빈의 말 따위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무작정 도끼를 휘두르며 먼저 장경에게 달려들었다. 장경은 잽싸게 물러서며 허리에 꽂은 단도를 뽑아 들고 괴수를 대적했다. 이런 위급지경을 본 장실이 동생을 보호코자 재빨리 단도를 뽑아 장경을 도우러 나섰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장빈이 다시 큰소리로 말하기를
“장군은 어찌하여 신분에 맞지 아니한 행동을 하시오. 병장기도 갖지 않은 타관의 장사치에게 이다지도 사납게 구신단 말이오. 어서 무기를 거두시고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괴수는 장빈이 열성적으로 목숨을 빌자 대답하기를
“나는 목숨에는 관심이 없다. 가진 물건을 원할 뿐이다. 어서 물건을 몽땅 털어내 놓아라. 만약 나를 속이려 들면 이 도끼가 용서치 않을 것이야.”
이런 무례한 말에 황신이 괴수의 간악함을 읽고 몸에 지닌 단도를 꺼내 휘두르며 괴수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9척 장신 괴수가 큰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졸개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장빈 일행을 둘러쌓다.
장실과 장경은 무기가 부실하여 괴수와 싸우기 힘들어 밀리는 형국이 되었다. 이와 같은 비세를 바라보던 급상이 등에 업은 석늑과 보따리를 장빈에게 맡기고 조개와 더불어 요도를 뽑아 들고 싸움판으로 뛰어 들었다. 장경과 황신이 괴수에게 밀리다가 이들이 도와주자 전세는 차츰 유리해지는데 뜻밖의 일이 발생하였다. 지척지간에 한 떼의 적도가 와~ 소리를 내며 몰려와 장빈 일행의 보따리를 잽싸게 약탈해 달아났다. 달아나는 적도들의 함성이 와~하며 흑망판에 멀리 메아리쳤다.
장경은 보따리를 빼앗기고 적도와 싸우느라 몸을 뺄 수 없는데 급상에게 위급상황이 발생했다. 그것은 장빈에게 맡겨둔 석늑과 보따리를 또 다른 적도가 둘러메고 달아난 것이다. 급상은 어찌해야 좋을지 마음이 급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참 싸우던 괴수를 버려두고 눈에 쌍불을 켜며 석늑을 매고 달아난 적도의 뒤를 쫓으며 소리치기를
“이놈들아, 물건은 가져가도 사람은 두고 가거라.”
“이놈아, 웬 잔소리가 그리 많으냐.”
급상의 말을 받아 대꾸하며 또 다른 적도가 급상을 가로 막고 싸움을 걸었다. 급상은 억지 싸움을 다시 한바탕 치르고 혈로를 얻었으나 석늑은 찾을 길이 막막하게 되었다. 이제 100보 앞도 구분하기 힘들게 날이 어두워 졌다. 캄캄한 밤길이지만 급상은 마음이 급하여 적도가 달아난 방향만 대충 짐작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급상은 온 힘을 다하여 더욱 힘차게 어둠을 뚫고 달렸다.
한편 적도를 보내고 장빈 일행과 싸우던 9척 괴수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이 놈들아! 물러가지 않고 항거할 테냐? 목숨이 아깝거든 물러가거라. 우리가 너희 목숨을 빼앗으려면 식은 죽 먹기다. 어서 칼을 거둬라!”
장빈이 괴수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았다. 아무리 무예가 출중해도 병장기가 부실해서 적도와 대적하기는 어려웠다. 도저히 물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장빈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자 여러분. 그만 싸움을 멈추게! 싸워 봤자 물건은 찾을 수 없게 됐어.”
이 말에 장경 일행이 모두 싸움을 멈추자 괴수도 무기를 거두고 수하들을 호령하여 물러났다. 장빈 일행은 닭 쫓던 개 지붕을 바라보듯이 떠나가는 적도를 멀건이 바라보며 전송할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적도가 싸움을 거두고 5리쯤 갔을 때였다. 급상이 적도들로 부터 석늑을 다시 빼앗아 업고 돌아오다가 장신의 적도 일행과 마주쳤다. 급상은 얼른 옆길로 빠져 달아났다. 그러나 적괴 도당은 급상이 등에 업은 석늑을 재물로 오인하고 이것을 빼앗고자 뒤를 힘껏 쫓았다. 그러나 말처럼 빠른 걸음을 가진 급상을 잡지 못하고 놓치고 말았다.
한편 장빈 일행은 급상이 돌아오지 않자 다 함께 큰 소리로 급상을 불러보았다.
“급상아! 늑아!”
“늑아! 급상아!”
장빈 일행이 외치는 고함소리가 밤공기를 뚫고 멀리 멀리 울려 퍼졌다. 그러나 메아리만 흑망판 넓은 들판에 울려 퍼질 뿐 급상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장빈 일행은 한동안 급상을 부르다가 모두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다. 이들 중 조개와 조염 형제는 막내아우 석늑을 잃어버리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한탄하였다. 이런 조씨 형제에게 장빈이 위로하기를
“급상은 만부부당의 용맹한 사람이오. 하루에 400 리를 능히 달릴 수 있는 준족이오. 800근을 넉넉히 질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 안심하시오. 석늑을 구하여 몸을 피했을 거요. 내 요량으로는 석늑을 구해오다가 우리와 싸우다말고 물러간 적괴도당을 만났기 때문에 피했을 것이오. 그래서 불러도 듣지 못했을 것이요. 지금은 밤이라 찾을 수가 없소. 내일 날이 새면 서둘러서 급상과 석늑을 찾아 봅시다.”
그 무렵 급상은 가야할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달아나는데 확실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급상은 그 소리가 적도들이 쫓아오면서 내지르는 소리로 알고 더욱 발 빠르게 달아났다.
장빈 일행이 급상을 잃고 절망에 빠져서 한동안 공기가 무거운데 장빈이 말하기를
“아까부터 이 근처를 살펴보니 인가가 보이지 않소. 요기라도 하려면 어제 묵었던 곽호의 집으로 되돌아갑시다.”
“아니오. 형들, 저기 저쪽을 보시오. 불빛이 보이오. 인가가 있는 성 싶소.”
황신은 장빈이 되돌아가자고 말하자마자 불빛 하나를 발견하고 말했다. 일행이 황신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바라보니 과연 산속에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일행은 행여나 저기를 찾아가면 요기를 할 수 있을까 기대를 가지는데 조개가 말하기를
“저 불빛을 찾아갑시다. 급상도 저쪽으로 갔으니 우리가 그곳에 가면 혹시 급상과 석늑의 행방을 알지 누가 알아요.”
그리하여 장빈 일행은 불빛을 바라보고 발길을 놓았다. 대략 20여 리를 부산히 움직여서 산 아래 당도하니 울창한 숲속에 거대한 장원이 나타났다. 불빛은 장원에서 생명수처럼 새어나오고 있었다. <계속> wwqq1020@naver.com
*필자/남양자 이순복.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