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직한 진산(鎭山)이 수려한 교목으로 숲을 이룬 가운데 장원이 버티고 있었다. 푸르른 달빛에 유난히 확 드러난 장원은 장엄해 보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적도들의 소굴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게 으스스했다. 장빈 일행이 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울안을 들여다보았다. 개 짖는 소리가 없고 사람이 적게 산다는 느낌을 주어서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장빈은 대문 밖에 서서 인기척을 내고서 주인을 찾았다. 한참 후에 사람 기척이 나더니 동자가 방문을 열고 나타나 묻기를
“뉘신데 야밤에 주인을 찾습니까?”
“길을 가든 나그넨데 날이 저물어 이슬을 피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장빈이 대답하자 방 안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동자가 댓돌을 밟고 내려와 대문 쪽으로 걸어왔다. 동자는 대문 가까이 와서 바깥의 동정을 잠시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그만 기겁을 하고 다시 안으로 종종걸음을 치면서 들어가더니 무어라 안에다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 것은 바깥의 사람은 알 수 없으나 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밖에 웬 장정들이 여러 명이 서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같이 몸이 장대하여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행여나 도둑의 무리가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동자의 말이 효과가 있었던지 방안 사람은 안에 기별을 넣고 재빠르게 장창 하나를 손에 쥐고 뜰로 내려왔다. 그리고 곧장 안채에서 두 장정이 긴 칼을 들고 달려 나왔다. 대문 밖에서 이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장빈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주인장께서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도적이 아니고 장사꾼입니다. 저녁때 흑망판에서 도적을 만나 행낭을 모두 빼앗기고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불빛 하나를 발견하여 찾아온 곳이 여깁니다. 부디 하루 밤 이슬을 피하게 해 주시고 굶주린 저희들의 배를 채워주시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주인은 장빈의 말을 듣자 그 말속에 점잖고 법도가 있어 보이자 마음이 움직여서 손수 대문을 열고 맞아드렸다. 장빈 일행은 주인을 만나자 정중히 절을 했다. 주인은 동자에게 일러서 손님들이 먹을 식사를 마련하게 하였다. 그리고 음식이 준비될 때까지 쉴만한 방으로 안내했다. 주인은 장빈 일행이 모두 자리에 차지하고 앉아 밝은 불빛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복식과 용모를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장빈 일행이 모두 용모가 단정하고 품위가 있어 보이자 주인은 말씨를 곱게 가다듬어 묻기를
“공들은 어디서 오신 뉘시기에 이 밤중에 이곳을 헤매고 있었습니까?”
“저희들은 모두 한중을 왕래하며 장사를 주업으로 하고 지냅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흑망판에서 도적떼를 만나 가졌든 행낭을 모두 빼앗기고 이렇게 헤매다가 귀인의 댁을 찾아와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실로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주인은 장빈의 말이 성에 차지 아니하여 다시 묻기를
“죄송하오나 공들의 존함을 알고자 합니다. 저는 왕복도라는 성명을 쓰고 있습니다. 원래 이곳은 민가가 많았으나 워낙 고을이 넓고 숲이 우거져 수년 전부터 도적이 출몰하게 되자 사람들이 겁을 먹고 거의 다 타처로 떠나갔습니다. 시방 이 일대는 도적떼 때문에 폐허가 되었답니다.”
“귀인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의 성명을 밝히자면 장문한이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저의 형제이고 친척들입니다.”
장빈은 지략이 뛰어난지라 이 짧은 시간에도 깊은 생각이 있어서 인지 자신의 성에다가 조염의 자를 갖다 대어 성명으로 삼아 말하였다. 그 때 손 날래게 저녁상을 차려왔다. 성찬은 아니지만 김이 무럭무럭 나는 따뜻한 밥상이었다. 장빈 일행은 주인에게 감사의 말을 드리고 몇 잔술로 목을 달래고 꿀 맛 같은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장빈이 주인에게 물었다.
“대인께서는 어찌하여 도적 떼를 피해 떠나지 아니하고 이곳에 남아 계시는지 알고자 합니다.”
“... ... ”
주인이 선 듯 대답을 아니 하자 조개가 참다못해 말참견을 하기를
“혹시 대인께서는 도적 떼들의 소굴을 아시고 계십니까?”
장빈과 조개가 두 가지 궁금증을 말하자 주인은 빙긋이 미소를 짓고는
“이 몸이 비록 늙었으나 창법을 약간 익혔다오. 아까 안채에서 나온 두 청년은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사는 진장굉이란 사람의 아들입니다. 두 청년은 무예가 비범하여 도적 떼를 제어할 수 있소. 여기서 20 리 안팎의 토지가 다 진씨와 나의 소유지요.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진씨와 나는 농사를 많이 지으므로 서로 자주 왕래하며 도와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낸 왕복도는 장빈 일행이 흑망판에서 만난 도적 떼의 괴수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흑망판의 수괴는 기안이란 사람으로 호를 벽안표라 하는데 용맹이 절륜하였다. 본래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한 것이 없이 자란 탓인지 독살스럽고 매몰찬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벽안표는 어려서부터 남들과 힘과 재주를 겨루며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남과 승부을 겨루어 지면 거금을 드려서라도 창봉술을 습득하여 상대에게 복수를 하고 마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그러던 그가 마침내 작당을 지어 멀고 가까운 고을을 쏘다니며 난봉꾼이 되었다. 그는 작당을 하는 과정에서 함부로 싸우고 때리고 치고 박고 눈에 보인 것은 다 손해를 입히자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 독불장군이 되고 말았다. 그런 벽안표를 그의 부모들은 17세에 장가를 들였다. 그의 처는 흔치 않는 미인으로 조행이 반듯하고 성정이 정숙한 여자였다. 몇 해 동안은 남편의 방자함을 보고도 참고 조신하게 살았다. 그러나 남편 벽안표가 점점 흉악해 지고 가산마저 탕진해 버리자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죽고 말았다. 그리고 또 다른 적괴는 성명이 조의란 사람으로서 본래부터 무뢰배로 자랐다. 단순하게 말하면 다리 밑 출신이었다. 그는 스스로 위의대장군 조상의 후예로서 사마의의 해함을 피하여 이곳 까지 밀려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조의도 용력이 출중한 터라 벽안표와 재주를 겨루어 보니 막상막하여서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함께 행동하며 지냈다. 그들은 비록 도적질을 하며 살지만 의협심이 강하여 선량한 사람은 해치지 아니하고 약한 자는 도와주었다.’
주인 왕복도가 긴 이야기를 마치자 장빈이 무릎을 치면서 말하기를
“대인께서 저들의 내력을 잘 아시니 우리가 어제 빼앗긴 행낭을 찾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왕복도는 고개를 두어 번 저어 보이며 말하기를
“저들은 도적으로서 재물이 손에 들어오면 곧장 탕진해 버립니다. 진정 잃어버린 물건을 찾고 싶다면 아까 보았던 젊은이의 아버지 진원달(자는 장굉)에게 청해 보십시오.”
“아아! 진원달이라 하시었습니까? 대인께서 진원달 그분을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장빈이 왕복도가 말하는 틈새에 끼워 부탁했다. 왕대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장공이 부탁하신 말씀은 새겨 두겠습니다. 우선 진원달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움직여도 늦지 아니할 것입니다. 진원달은 원래 조후부 사람입니다. 그의 고향이 전란에 휩싸이게 되자 권속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옮겨와 사는데 대대로 부유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는 능히 육도삼략을 아는 현인입니다. 육도삼략의 저자 태공망(太公望)은 60가지 속임수와 30가지 전략을 창안하여 그 책을 육도삼략 (六韜三略)이라 했습니다. 태공은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 앉아서 때가 되기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72세 때 주(周)나라 문왕(文王)을 만나 의기(義氣)를 펴고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강태공은 정곡(正鵠)을 찾아낼 수 있었든 예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가 강조하기를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때가 되면, 주저하지 말고 치라고 했다.
•어리석어 보이는 적은, 속임수에 달관할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달아나는 적을 장기간 추격하던 중, 나무가 많이 잘라진 상태를 보고, 적(敵)은 군사를 모아 창을 만들어 역습기회를 노린다고 판단했다. 는 내용으로 육도삼략을 엮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깊은 술수가 숨어 있는 책을 깊이 헤아려 알고 그의 덕성은 멀리 알려졌으며 문장도 한 나라를 다스릴 만큼 깊습니다. 남의 어려움을 주저치 않고 도와주고 감싸 안아주며 희생과 봉사하는 것을 즐기면서 때를 기다리며 숨어 사는 인물입니다. 이제 이 사람이 서장 한 장을 써서 드릴 테니 가지고 가시면 기안과 조의 두 적괴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장빈은 왕복도가 써 준 서장을 받아 갈무리하고 진원달의 두 아들을 따라 가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적괴들에게 시달려 고단한 몸이라 일행은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늦잠이 든 장빈 일행은 숲속에서 짖어대는 새소리에 잠이 깨었다. 그리고 왕복도가 베풀어 준 아침상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진원달의 두 아들이 서둘러 떠나자고 재촉했다. 장빈은 왕복도와 헤어지며 예의를 다하여 감사의 말을 전하기를
“대인의 은혜는 넘치는 광영이었습니다. 이제 진원달 어른을 찾아가 뵙고 그 후 일이 잘 풀려서 자리를 잡게 되면 서장을 보내어 오늘 우리에게 베푼 은공을 반드시 갚겠습니다.”
왕복도는 장빈의 횡설수설하는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저 우물쭈물하며 겸사의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길을 재촉하여 중화 무렵에 장빈 일행은 진원달의 장원에 당도하였다. 먼저 집안으로 들어간 두 아들이 되돌아 나와서 말하기를
“아버지께서는 지금 밖에 나가셨습니다. 몇몇 친구들과 서봉루에 가신 모양입니다. 들어와서 기다리시면 제가 기별을 넣어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조개는 급상과 석늑의 행방을 몰라 마음이 조급해서 말하기를
“서봉루란 데가 어딘지 가르쳐 주시면 우리들이 직접 찾아가 뵙겠습니다.”
조개의 말에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여기서 서봉루는 상당히 멀어요. 오늘 해가 지기 전에는 못갑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 깊은 계곡에서 정상을 거의 다 올라가야 있습니다.”
“그렇군. 그래. 설령 저 산의 정상이라 해도 여기서 기다리고 시간을 축내는 것 보다 우리가 발로 움직여서 찾아가는 것이 빨리 진 어른을 뵐 수 있을 것이오.”
장빈이 조개의 조급한 마음을 챙기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모든 일행이 찬동하여 장빈 일행은 청년이 일러준 대로 서봉루를 찾아 길을 떠났다. 눈 안에 들어온 산을 부지런히 찾아가 계곡어귀에 다다르니 별천지가 나타났다. <계속> wwqq1020@naver.com
*필자/남양자 이순복. 소설가.